민영화 괴담?…‘소통 부재’ 李정부에게 물어봐
입력: 2008년 05월 23일 16:24:49
#. 21살때 자궁경부암에 걸렸다. 환자에게 지급되는 돈을 ‘손실’로 보는 민영보험사는 “젊은 여성은 자궁암에 걸릴 수 없다”며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다.
#. 작업 중에 손가락 2개를 잘렸다. 보험 적용이 안되는 손가락 봉합 비용을 감당 못해 결국 손가락 1개는 포기해야 했다.
#. 골수암으로 생명이 위태롭다. 운좋게 골수 기증자를 찾아냈지만 보험회사는 수술비 지급을 거절했다. 수술이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결국 3주 만에 숨졌다.
보험업계에서 ‘해결사’라는 명성을 누렸던 리는 이렇게 말했다. “살인사건 수사하듯 조사하면 다 나온다.” 함정을 파놓고 보험 가입자를 밀어넣으면 걸리지 않을 이가 없다는 것이다.
-“李대통령은 ‘식코’ 꼭 보세요”-
끔찍하다. 다행히 영화 속 얘기다. 그런데 픽션이 아니다. 가장 잘산다는 나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자국의 치부를 거침없이 쑤시고다니는 마이클 무어 감독은 영화 ‘식코’(환자를 뜻하는 속어)에서 영국, 프랑스, 쿠바의 의료시스템과 비교하며 미국 민영의료보험 제도의 허점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돈없고 병력이 있는 환자를 의료제도의 사각지대에 방치해 결국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결론이다. 돈이 없는 위급 환자를 길거리에다 쓰레기처럼 내다 버리는 미국의 현실을 남의 집 불구경할 일이 아니라고 경고하는 무어 감독. 그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누구인가?(who are we)”
물론 이 영화에 대해 “미국 빼곤 모든 나라가 의료 유토피아라는 오해를 살 수 있다”, “너무 단순하며 자극적이다” 등의 반론도 있다. 하지만 “왜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게 굴러가느냐”는 무어 감독의 순수한 의구심에 그 누구 하나 토를 달지 못하고 있다. 국내 관객의 예상치못한 호응에 장기상영에 돌입한 극장 (스폰지하우스. 압구정점. 16일)에서도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반응이 감지됐다.
친구 추천으로 일부러 발품을 팔았다는 주부 ㅂ씨(49)는 “미국을 지상 최대의 낙원이라 생각한 이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좀더 다각적인 시각으로 미국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며 “인간의 존엄성을 이렇게 처참히 짓밟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따름이다. 소위 많이 배웠다는 분들, 미국의 이같은 현실을 모를리 없다. 광우병 소에 열받은 젊은이들의 심정을 이해하겠다”고 했다.
직장인 김효정씨(25.여)는 “재미있었다”면서도 “섬뜩하다”고 했다. 긴 한 숨을 내뱉었다. “보험회사가 국민들을 가려 보험에 가입시키며 특히 질병을 가진 자는 절대 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우선은 다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들은 약속이나 한듯 “(정책을 결정하는) 윗 분들은 영화를 꼭 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상에서도 이들처럼 “이명박 대통령은 꼭 이 영화를 봐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영화후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괴담의 진원지는 이명박 정부”-
정부는 건강보험 민영화와 관련된 네티즌의 우려를 쇠고기 파동으로 유행어가 돼버린 ‘괴담’으로 치부하고 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나 보건복지가족부는 “건강보험 민영화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면서 “최근 인터넷 등에서 정부가 건강보험을 민영화하여 미국형 의료보장 시스템을 도입하려 한다는 정보는 과장·왜곡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부는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곧바로 뒤따랐다. 국민건강세상네트워크는 “정작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의료서비스 민영화’다”고 반박했다. 이 단체는 “영리병원을 허용하면 환자의 질병 치료 보다는 돈벌이를 앞세우는 진료가 나타날 것이 뻔하고, 환자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의료이용의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민들은 이명박 정부의 의료산업화 정책 방향이 궁극적으로 미국적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불안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도 “복지부가 건강보험의 민영화를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다행이지만 이는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이명박 정부의 입장과 상호 충돌하고 있어 어느 것이 사실인지 국민들은 혼란스럽다”고 밝혔다. 또한 “복지부 말처럼 ‘건강보험 민영화’는 아니더라도 복지부가 추진하는 정책은 의료의 민영화 정책”이라며 “네티즌들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건강보험 민영화)은 출처 불명이 아니라 바로 이명박 정부로부터 나온 것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네티즌의 반응 역시 차가웠다. “안심시키고 뒤통수 때리고…”(네이버 아이디 kenmagician), “절대 못믿는다”(ht811), “지금까지 한 짓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나”(steelco), “사실무근이 진실인게 한두번인가”(kakisu1113) 등 현 정권을 못믿겠다는 발언이 잇따랐다.
한 네티즌(infant0463)은 “광우병 보다 더 무서운 게 의료 민영화”라며 “(미국산)쇠고기는 안먹는다 치자. 정말 아프면 당장 병원가야 하는데 이제 큰일이다. 병원도 못가게 생겼으니 아픈것만큼 서러운것도 없는데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고 했다.
-민영화 추진, ‘여론 반발’ 새 복병-
‘의료 민영화’ 뿐만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중인 각종 정책에 대한 불신은 ‘수돗물 괴담’까지 낳았다. 환경부가 이달 중 ‘물산업지원법’ 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민영화 작업을 본격 착수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면서 인터넷에선 “민영화되면 하루 수도요금이 14만원에 이를 것”이라는 내용의 글들이 빠르게 퍼졌다.
‘공기업 민영화’ 문제 역시 서민들의 건강권 및 생존권 문제와 직결됐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털사이트 다음에서는 이미 이 대통령 탄핵 서명과 함께 ‘수돗물 민영화 반대’ 서명이 활발히 진행돼 사회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공무원 노조 등 일부의 반발만 억누르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정책도 여론의 반발이라는 새 복병을 만난 셈이다.
‘민영화’와 관련한 일련의 움직임을 두고 한 네티즌(다음 아이디 ‘겨울아이’)은 “정말 돈 없는 중생은 물도 먹지 말고 인터넷도 하지 말고 미친 소 먹고 아프면 병원도 못 가서 죽어라, 이런 뜻처럼 들린다. 좋게 생각하려 해도 좋게 생각이 안든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무어 감독은 영화에서 “교육이나 의료서비스나 (국민들은) ‘가정 친화적’인 제도를 원한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했다. 쇠고기 대란에서도 드러난, 이명박 정부의 최대 허점으로 꼽히는 ‘소통의 부재’를 질타하는 소리로 들린다.
<고영득 경향닷컴 기자 ydko@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