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영국 노동당의 패배를 초래한 무원칙과 안일
그제 실시된 영국 총선에서 야당인 보수당이 집권 노동당을 제치고 제1당에 올랐으나 과반수 획득에는 실패했다. 투표 전 돌풍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됐던 자민당은 기존 의석을 지키지도 못했다. 이에 따라 보수당 소수정권이나 연정이 등장하게 되겠지만 벌써부터 새 선거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정국 전망은 불안하다.
단독 과반수 정당을 내지 못한 이번 선거 결과는 영국인들이 노동당 정권에 깊이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보수당도 신뢰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보수당의 승리가 아니라 노동당의 패배라고 해야 옳다. 텔레비전 토론에서 선전한 닉 클레그 당수 덕에 한때 높은 인기를 누린 자민당은 진보·보수 양당제의 뿌리깊은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노동당의 패배는 사실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노동당에 가장 직격탄이 된 것은 심각한 경기침체와 누적된 재정적자 등 경제문제다. 노동당은 교육과 의료를 강조하고 빈곤층에 대한 복지 혜택을 확대하는 등 나름대로 진보적인 정책을 취했지만, 세계적 금융위기의 여파로 경제가 뒷걸음질치면서 중산층의 지갑은 얇아지고 빈부격차는 확대됐다. 또 1600억파운드(286조원)를 넘는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증세나 상당한 재정지출 삭감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또다른 문제는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부시의 푸들’로 불린 것처럼 대외정책에서 노동당 정권이 지나치게 미국을 추수해온 점이다. 노동당 정권은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데 이어 아프가니스탄전쟁에도 많은 병력을 보냈다. 최근 아프간전에서 사망자가 늘어나면서 명분도 없는 전쟁에 왜 젊은 병사의 목숨을 바쳐야 하느냐는 비판에 직면해왔다.
그런데도 장기집권에 안주해온 노동당은 국민들의 고통에 둔감했고 금융산업 위주의 정책은 복지정책 등의 후퇴로 이어졌다. 경제위기 이후 시장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등 정책 전환을 시도했으나 지지층을 되돌려오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런 와중에 당은 사분오열했고 고든 브라운 총리는 이를 추스르지 못한 채 오히려 설화까지 빚어 당 지지율을 끌어내리는 데 한몫했다. 이번 선거 결과는 장기집권의 안일에 빠져 국민 뜻을 살피지 못한 정권에 대한 냉엄한 심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