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뒤늦은 걱정 “한미 FTA, 이대로는 곤란하다”
[왜 다시 '한미 FTA'인가] 세계 금융 위기와 한미 FTA
기사입력 2010-07-14 오전 8:46:44
고 노무현 대통령의 우려
2008년 11월,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미 간 협정을 체결한 후에 세계적인 금융 위기가 발생했다. 우리 경제와 금융 제도 전반에 관한 점검이 필요한 시기”라며 “한미 FTA 안에도 해당되는 내용이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고 고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고쳐야 할 것”이라며 은연 중 재협상까지 암시했다.
그렇다. 원래 청와대의 뜻대로 2006년 말에 비준까지 완료됐다면 2007년에 월스트리트의 파생상품이 물밀듯 들어왔을 것이고 미국발 경제 위기의 쓰나미는 우리나라를 완전히 삼켜버렸을 것이다. 한미 FTA를 보면, 미국에서 생긴 신상품은 네거티브 리스트 원칙에 따라서 한국 시장에도 직수입된다. 물론 우리의 금융위원회가 시스템 위기를 고려하여 규제할 수 있지만 미국 금융 당국이 하지 않은 규제를 우리가 스스로 알아서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금융만 그런 게 아니다. 지난 4년간 되뇌고 또 목이 터져라 외친 것처럼 한미 FTA의 본질은 미국식 법과 제도를 한국에 이식하는 것이다. 특히 서비스 산업에 미국식 시스템을 전격적으로 도입하고 동시에 아무리 부작용이 심해도 되돌아 갈 길을 끊어 버리는 게 한미 FTA의 핵심이니 노무현 전 대통령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게다.
협상 체결의 일로매진을 총 지휘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우려할 정도로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는 역사적 대사건이다. “현재의 위기는 약 10년마다 오는 산업 순환 상의 위기에, 시장만능론이라는 30년짜리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기, 그리고 100년에 한번쯤 오는 패권국가의 위기가 겹쳐진 것이다.” 말하자면 ’3중의 위기’인 셈인데 1929년 즈음의 대공황기가 이에 해당하는 유일한 역사적 사건이었을 만큼(물론 패권국가 위기의 위치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지만) 우리는 지금 좀처럼 체험하기 힘든 역사의 고비에 서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한미 FTA가 추진되던 시기에도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예컨대, 다음 글을 보라.
“한미 FTA와 어우러진 시장만능의 세계는 양극화를 극단으로 진행시킬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미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금융화한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미국은 이미 파산 상태다. 다행히 연착륙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앞으로 몇 년간 미국의 경제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 앞으로 수년이 거시 경제 정책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이다. 참여정부에 시작된 ‘묻지마 FTA’는 이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모두 발효가 되고 더 많은 FTA를 추진하게 될 것이다. 국내에는 자산 버블이 극단으로 진행된 상태인데다 무분별한 개방으로 충격 흡수 장치는 모두 제거됐다. 그 결과는? 불행하게도 97년을 능가하는 위기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관련 기사 : “이민 가세요. 안 되면 시골로”)
이보다 훨씬 전에도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이미 한계를 보일 데로 다 보이고 군사력 밖에 의존할 데가 없는 붕괴 일로의 미국형 제도는 결코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닙니다. 지금 정부가 하는 일은 난파선에 스스로 올라타는 격입니다” (정태인, “저는 지금 멕시코로 갑니다”, <시사저널> 2006년 5월)
내가 무슨 예지력을 지니고 있다거나 굉장한 경제학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가 결코 아니다. 미국 주류의 경제학자처럼 시장 맹신, 미국 맹신에 빠져 있지만 않다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이런 예측이 실현되고 있고 또 앞으로도 몇 년 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데 아직도 한미 FTA는 국회에서 마지막 관문만 남겨 두고 있다.
다행히 아직까지 한미 FTA는 비준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이 무시무시한 위험을 제거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얘기다. 한미 FTA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민주당(당시 열린우리당), 그리고 국민참여당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지난 지방선거 때 외쳤던 것처럼 보편 복지를 지향하고 양극화를 막아서 서민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게 진정이라면 그 상극인 한미 FTA를 철저하게 재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마땅히 폐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총지휘했던 노무현 대통령도 미국발 금융 위기를 보면서 “필요할 경우에는 한미 FTA를 고쳐야 한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프레시안
천안함, 전작권, 그리고 한미 FTA
금년 봄 천안함이 침몰했을 때 그 어느 누구도 이 사건이 전시작전권 전환 연기, 한미 FTA 비준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측하지 못했다. 언젠가 밝혀지겠지만 젊디젊은 우리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이 엉뚱하게 미국의 횡재로 이어지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전략적 유연성, 그 일부인 주한 미군의 신속기동군화는 전작권 환수와 연결돼 있다. 주한 미군이 세계의 신속군이 되기 위해서는 거추장스러운 전시작전권을 내주어야 하는데 노무현 정부는 중국을 겨냥한 평택 미군 기지 이전의 비용을 치르기로 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서해에서 발생한 의문투성이의 군함 침몰이 전작권 전환을 2015년까지 미루도록 하고 덧붙여(?) 한미 FTA 재협상까지 일사천리로 전개되고 있다. 대연정으로 시작한 노무현 정부의 2005년 여름이 2006년 2월 한미 FTA 협상 개시 선언에 이르기까지 몰락의 길을 걸었던 악몽이 되풀이되고 있다. 첫 번째 사건이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로 일단락됐다면 두 번째 사건은 도대체 어떤 코미디로 귀결되는 것일까?
이 부분 역시 세계 금융 위기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금융 위기 이후 우리의 예측보다 빨리 미국과 중국 간 G2의 세계가 열렸다. 경제 위기에 빠져 달러 패권이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는 지금 미국은 거의 모든 사안에서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살 길은 중립을 표방하며 캐스팅보트를 쥐는 것뿐이다. 그런데 경제와 외교 안보 양 면에서 미국에 붙어 버리는 길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천안함 사건은 미국에 횡재를 선물했다. 마치 2008년 4월 이명박 대통령의 방미가 ‘쇠고기 완전 수입 자유화’라는 횡재를 오바마에게 제공했던 것처럼……. ‘국제 사기극’의 비용을 또 국민이 치러야 하는데 이번엔 그 규모가 훨씬 크다.
“미국은 어떤 선택을 할까? 아마도 1980년대 중반의 플라자협정, 그리고 미일반도체협정을 떠올리며 만만한 나라에 비용을 치르게 하는 단기 해법을 들고 나올 것이다. 다만 이제 그 상대가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사실이 미국의 고민일 테고 훨씬 만만한 상대로 한국이 자동차 등에서 먼저 시험대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 목숨을 건 환율 전쟁, 금리 전쟁, 통상 마찰. 심지어 군사적 전쟁. 그 한복판에 한반도가 있다.” (정태인, “세계 금융 위기와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 <세카이>, 2009년 4월)
오바마의 이런 고민을 이명박 대통령이 단숨에 해결해 준 것이다. 자동차 재협상이 바로 그것이다.
자동차 재협상과 쇠고기 완전 수입 자유화
한미 FTA에서 한국 정부가 가장 성과를 거뒀다고 자랑하는 자동차 분야 역시 미국의 요구를 거의 100퍼센트 들어 준 것이었다. 3000시시 미만 자동차의 2.5퍼센트 미국 관세 철폐를 얻어낸 대가로 한국이 약속한 것은 8퍼센트인 자동차 관세 인한뿐만 아니라 세제 개편, 환경 기준 완화, 자동차 표준협력반 설치, 그리고 스냅백 조항이다. 스냅백이란 “협정 위반 또는 관련 이익을 무효화하거나 침해하고 심각하게 판매, 구입, 유통에 영향을 미친다고 판정할 경우” 6개월 내에 관세 장벽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했으며 정부의 비위반 제소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번 재협상에서 미국 자동차 업계는 시장 점유율과 관세 철폐를 명시적으로 연계하는 방안(이른바 “performance metric”)을 요구할 것이다. 이들은 미국 자동차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시장 점유율인 40퍼센트를 목표로 제시했다. 예컨대 미국의 2.5퍼센트 관세를 다섯으로 나눠서 미국 자동차의 시장 점유율이 8퍼센트 올라갈 때마다 0.5퍼센트씩 인하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물론 현재 한국 시장의 1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미국의 대형 자동차가 한국에서 급작스레 많이 팔릴 리 없지만 정부가 이면으로 약속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2007년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고속도로 순찰차를 미국차로 바꾼다든가 군용 트럭 입찰에 미국 기업의 참여를 보장할 수 있다. 또 하이브리드 자동차에 대한 세율 인하나 보조금 지급 등도 고려할 수 있다.
한편, 한국 자동차 업계는 수출 자율 규제를 약속하고 현지 생산을 늘릴 수도 있다. 마지막 두 가지 방안은 미국 자동차 업계에 직접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미국 내의 고용이 늘어난다는 점에서는 유효하다. 양국 정부의 공언대로 본문에 손대지 않고 부속 협정(side agreement)을 맺는 방식으로 재협상이 이뤄질 것이 확실하다.
촛불이 겨우 막아 놓은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도 자유화할 가능성이 높다. 2010년 2월에 발간된 미국 의회의 CRS 리포트((Cooper et. al., The Proposed U.S.-South Korea FTA : Provision and Implication)는 앞으로의 쇠고기 수출은 “한국 소비자의 신뢰 회복”과 “경제 위기 속에서 한국 소비자의 구매력”에 달려 있다고 요약하고 있다. 즉, 이미 민간 수출 자율 규제 형태로 되어 있는 현재 협약 내용을 별도로 고칠 필요는 없다. 소비자의 신뢰 회복을 이유로 더 풀라고 요구하면 그만이며 따라서 한국 정부 역시 규제를 푸는 방식(예컨대 곱창의 검사 방식)으로 미국의 요구를 조용히 수용할 것이다.
미국의 검토 보고서를 보면 지적재산권, 서비스, 투자 분야에서는 거의 100퍼센트 만족하지만 농업, 제조업, 그리고 무역 구제 분야에는 불만이 꽤 많이 제시되고 있다. 예컨대 검토위원회를 구성하는 걸 빼곤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는 무역 구제 분야에서도 그런 절차를 삭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런 분야가 모두 재협상 목록에 올라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7월 재보선 등 앞으로의 선거에서도 ‘정치 연합’은 활발하게 논의될 것이다. 한미 FTA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민주당(당시 열린우리당)에게 최소한 국정 조사에 의한 한미 FTA의 전면적 재검토를 요구해야 한다. 지난 지방선거처럼 지레 포기할 일이 결코 아니다.
나아가서 2012년 대선까지 한미 FTA 비준을 미루고 그 때까지 범야 진영은 외교 안보, 통상 분야의 대안을 마련해서 ‘정치 연합’의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 앞으로 20~30년간 미국과 중국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전작권 전환 연기, 한미 FTA 비준은 나라 전체를 크나큰 위기에 빠뜨리는 역사적 과오다.
/정태인 경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