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하는 복지부장관의 마인드
리병도 약사(전 건약 회장)
데일리팜(etchoi@dreamdrug.com) 2010-07-29 06:26:10
가끔 프랑스나 영국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소식을 들으면서, ‘왜 프랑스 시민들이나 영국 시민들은 파업으로 엄청 불편을 겪으면서도 별로 불평을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같으면 언론이 장난이 아닐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들이 철로를 점거하고 포도주에 빵을 곁들여 먹고 있는 평화로운(?) 파업 사진에 왜 우리 파업현장은 그렇게 비장하고 또 경찰들은 노동자들을 과격하게 진압할까 – 작년의 쌍용차 파업과 헬리콥터까지 동원된 진압작전(?)을 기억할 것이다 –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럽의 대부분 노조들은 우리처럼 기업별 노조가 아니고 산별노조라는 것이다. 우리는 특정 기업을 그만 두면 조합원 자격이 없어지지만, 유럽은 산별노조로 특정 기업을 그만 두더라도 조합원으로 남아 있을 수 있고, 취업 전이라도 자신이 희망하는 분야의 산별노조에 가입할 수 있다.
장관도 노조에 가입할 수 있고, 초등학교 때부터 단체교섭 실무를 가르치는 등 노조가 사회를 바르게 하고 균형된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전 국민적인 합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노동자의 파업을 노동자 이기주의로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하나 우리의 파업은 왜 그리도 전투적으로 언론에 의해 그려지는가? 그것은 회사에서 해고되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쌍용차파업에서 그동안 이룬 단체협상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만 남기고 단체협상에 합의한 것이 자녀학자금 문제라고 한다. 우리는 회사를 그만 두면 그 순간부터 자녀교육, 의료, 노후생활을 개인이 다 책임져야 한다. 그러니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유럽 사람들은 해고되더라도 기본적인 생활은 가능하다. 자녀학비도 무료고, 프랑스 대학생들의 시위를 촉발했던 등록금도 2~30만원에 불과하다. 의료도 보장되어 있고 기본적인 주거도 보장이 된다. 이런 상황들이 우리처럼 기를 쓰고 해고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다.
우리가 의료의 민영화에 반대하는 것도 의료보장성 확대 운동을 하는 것도, 본인부담금을 줄이거나 본인부담금상한제 운동을 하는 것도 다 이런 사회안전망을 개인이 아니라 국가에서 – 사회적으로 책임을 지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런 보건의료뿐만 아니라 우리 시민들의 복지도 책임지는 자리다.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기초생활보장을 책임지는 자리다.
그런데 조만간 보건복지부장관이 바뀔 모양이다. 정관계 소식통들에 따르면 7.28 재보선 직후 단행될 개각에서 복지부장관 교체가 기정사실로 굳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후임 장관에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과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박재완 수석, 심재철 의원과 함께 유력한 후보군에 포함됐던 진영곤 사회정책수석은 청와대에 잔류했다.
박재완 수석은 “병원장, 경영인 안 될 이유 없다 – 성역을 없애겠다”고 진입규제 완화 강력 추진을 시사하고(메디게이트뉴스 2009, 3, 23) 또 “집권 후반기, 일자리 창출에 역점 둘 것”(조선비즈닷컴 2010. 5. 10)이라며 “일자리 창출을 위해선 보건·의료, 미디어, 정보통신, 금융 등에서의 규제를 풀어 민간투자를 확대하고 외국인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수석이나 심 의원이나 누가 되든 전재희 장관 이후의 장관후보들에게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심 의원이 복지부장관에 오르면 의료민영화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 가능성이 크다”며, 심 의원에게도 경계심을 나타냈다.
우리가 이렇게 보건복지부장관의 교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보건복지부가 우리나라 사회안전망의 기초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안전망은 그 나라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지금 정부는 G20으로 국격을 높인다고 하지만, 우리는 지금 OECD 국가 중 모든 사회안전망 지표가 꼴찌에서 맴돌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다른 정부부서와는 다른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 번 전재희 장관과 윤증현 장관이 충돌하는 모습을 봐 왔다. 그리고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부서 특성상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설 수 밖에 없다. 세계인권선언에서는 건강권을 인권으로 보고 있다. 제22조에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제25조에는 ‘모든 사람은 먹을거리, 입을 옷, 주택, 의료, 사회서비스 등을 포함해 가족의 건강과 행복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했다.
1978년 알마아타에서 열린 일차보건의료에 대한 국제회의는 전 세계 인류의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해, 모든 정부, 보건의료 및 국제 개발 종사자들과 세계 지역사회들이 긴급한 행동을 할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단순히 질병이나 허약 상태가 아닌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의 건강은 기본적인 인권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보건의료 부문과 더불어 다른 많은 사회 경제 부문의 행동이 필요하고, 정부는 자국민의 건강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선언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를 위한 부서가 보건복지부다. 그래서 복지부장관에는 한 마디로 ‘개념 있는 사람’이 와야 한다. 보건복지는 – 보건의료는 산업이 아니다. 보건의료는 이익을 내야 하는 비즈니스가 아니다. 보건복지 예산은 쓸 떼 없는 돈이 아니다.
백 번 양보한다 해도 시민들이 건강하고 튼튼해야 일도 할 수 있다. 그래야 경제도 돌아간다. 경제를 위해 시민들을 – 노동자들을 이용해 먹으려 해도 최소한 건강은 지켜주어야 한다. 그렇게 했던 20세기 초 유럽의 가치기준이라도 갖춘 사람이 보건복지부에는 필요하다.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다. 건강권은 이데올로기도 좌우의 문제도 아니다. 보건복지 확대나 의료보장보다 의료산업화에 관심이 더 많은 보건복지부장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기업과 경영자 편에 서려는 노동부장관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