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FTA 저지 범국본 “FTA 이익 95%가 자동차라더니, 이제 뭐냐”

“한국은 ‘FTA 허브’ 아니라 ‘FTA 동네북’
“FTA 저지 범국본 “FTA 이익 95%가 자동차라더니, 이제 뭐냐”
기사입력 2010-12-05 오후 4:29:57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가협정이 미국차의 국내 진출 문턱을 크게 낮춘 채 마무리됐다. 기존의 독소조항은 단 하나도 수정하지 못한 채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만 추가로 들어준 결과가 나와, 한국의 이익은 크게 훼손됐다.

이번 재협상은 애초부터 상식에 맞지 않는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로 시작됐다. 기존에 만들어놓은 합의문이 있는데도, 자동차업계의 강력한 요구를 정치적으로 소화한 미국 정부가 ‘생떼’를 부렸고, 한국 정부가 이를 용인하면서 굴욕적인 결과를 낳았다.

미국차 국내 진출 전기 마련

통상교섭본부가 5일 밝힌 이번 재협상의 최대 핵심은 자동차 부문에서 미국의 이익이 관철됐다는 점이다.

우선 미국산 자동차의 국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관세철폐기한을 미뤘다. 한국은 미국산 승용차에 대해 FTA 발효 즉시 관세 8%를 절반인 4%로 낮추고, 4년 후에는 완전히 철폐한다.

반면 미국은 3000cc 이상의 한국산 자동차에 대해 관세 2.5%를 4년간 유지한 후 철폐한다. 2007년 합의 때보다 관세 적용기간을 2년 연장했다. 그만큼 한국산 자동차의 수출경쟁력은 떨어지게 됐다.

이와 더불어 자동차 부문에 한해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처)도 도입키로 했다. 세이프가드는 한-유럽연합(EU) FTA 의 절차적 요소를 충족하면 발동 가능하게 된다. 이 조항에 따르면 세이프가드를 미국이 조치하더라도 최초 2년 동안은 보복이 금지된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우리나라 자동차의 대미 수출물량이 점차 떨어지고 현지 생산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한국산 자동차의 미국 수입량이 급증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세이프가드 발동 조건이 걸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강조했다.

실제 한국자동차공업협회가 제공한 자료를 보면 한국 승용차의 미국 수출 물량은 지난 2004년 85만여 대에서 작년에는 45만여 대로 크게 줄어들었다. 현대차, 기아차 등 대형 메이커가 미국 현지에서 생산하는 물량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FTA로 인해 그만큼 한국 자동차 메이커는 해외진출을 가속화할 우려가 높아질 수 있다. 국산 자동차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는 이유다.

미국 자동차의 안전기준 요건을 낮춘 것은 앞으로 더 큰 마찰을 불러올 수 있다. 양국은 당초 6500대로 한정한 한국 내 연간 판매량 기준을 2만5000대로 올려, 이 판매수량 이하의 제작사에 대해서는 한국의 안전기준이 아니라 미국 내 안전기준을 충족해도 한국의 안전기준을 충족한 것과 동일한 지위를 부여키로 했다.

그런데 이는 한국이 FTA를 맺은 또 다른 거대경제권인 EU와의 마찰을 불러와 한국에 더 큰 피해를 줄 수도 있다. EU는 통상적으로 대외 경제정책을 맺을 때 패리티(parity, 균형) 전략에 따르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이번 협상 결과를 두고 EU마저 한국에 FTA 재협상을 요구해올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실제 EU집행위원회 측은 이번 한미 FTA 재협상을 두고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언론에 밝힌 바 있다.

미국과 달리 한EU FTA는 자국 안전기준 요건이 없고, 2013년까지만 EU 안전기준을 인정하고 있다. 미국차가 안전기준 혜택을 받고 국내 시장점유율을 늘려가는 걸 EU가 그대로 두고볼 리 없다. 미국이 이번 재협상에서 ‘EU와 형평성’을 요구하며 관세환급 축소를 요구한 전례로 볼 때, 이번 FTA 재협상은 매우 나쁜 선례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백일 울산과학대 교수는 지난 3일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G20 및 APEC 경제통상분야 평가와 전망’ 토론회에서 “이번 재협상으로 인해 EU, 미국이 일종의 상승작용을 일으켜 지속적인 재협상을 요구해올 것”으로 우려했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한미 FTA 협정문 본문 자체도 한국의 비관세 영역을 사실상 초토화시킨 내용이다. 전대미문의 ‘스냅백(관세철폐환원제도)’이라는 독소조항까지 받아들였다”며 “통상외교의 완벽한 실패이자 파산”이라고 비판했다.

▲ ⓒ프레시안

독소조항은 그대로, 찾았다는 이익은 유명무실

정부는 이와 같은 비판을 의식한 듯 돼지고기 부문과 의약품, 비자부문에서 우리의 이익을 관철시켰다고 강조하지만, 이는 미국의 성공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의약품의 경우 국내 제약업계는 허가-특허 연계제도의 도입 자체를 반대했으나 도입시기를 늦추는 수준의 결과만 얻어냈다.

우리 업체의 주재원 비자(L-1) 연장은 정부도 인정하듯 이번 FTA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이다. 이 교수는 “비자쿼터는 이민법과 관련된 내용으로 미국 의회의 관할사안이지, 무역대표부(USTR)나 대통령이 약속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오히려 이번 FTA는 국내 시민단체나 학계 등에서 제기한 기존의 독소조항을 단 하나도 손대지 못하고 남겨, 기존보다 더 나쁜 수준의 FTA로 변질됐다.

한국 정부는 이번 재협상에서 FTA 역사에서도 눈에 띄는 불평등조약인 스냅백은 물론, 허가-특허 연계제도,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래칫(역진방지장치), 비위반제소 등 독소조항을 단 하나도 의제로 올리지 못했다. 의약분야에서 시행시기를 보자 늦춘 게 유일한 성과다. 김 본부장 등 협상 관계자들은 이와 같은 지적들을 두고 애초에 “독소조항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였다. 수정을 기대할 형편이 못됐다.

ISD는 통과될 경우 주권논란까지 빚을 수 있는 사안으로, 정부의 자본 통제가 사실상 무력화되는 대표적 조항이다.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정부가 영세상인 등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더라도 미국 기업들이 곧바로 ISD를 근거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 수 있다. 이렇게 바뀐 조항은 래칫으로 인해 되돌릴 수도 없다.

지난 2008년 2월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수석전문위원실은 ‘한미FTA 비준동의안 검토보고서’에서 “하나의 지역통상협정이 수십 개의 법령을 제ㆍ개정하는 결과를 초래해 국회 입법권 잠식 우려가 있고 국회가 FTA 내용 형성 과정에서 보고 청취 등 극히 제한적인 참여만 할 수 있어 권력분립 취지에 맞는지도 의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 FTA 협정 내용 중 미국만 지켜야 하는 조항과 한국만 지켜야 하는 조항의 비율이 한미 FTA는 1대 8에 달한다. 미국과 파나마가 1대 1.5, 미국과 바레인은 1대 2, 미국과 호주는 1대 0.8에 불과하다. 절대적으로 불평등한 조약임을 국회도 인정한 셈이다.

“미국 요구 일방 수용…최악의 재협상”

국민적 관심이 큰 쇠고기 문제는 비록 이번 FTA 재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으나, 언제든 별도의 채널로 논의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말한대로 쇠고기 문제는 FTA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양국 사이에는 통상절차를 논의하는 채널이 다양하게 있다.

이처럼 이번 재협상 결과가 우려했던 대로 나오자, 관련 시민단체와 학계는 크게 반발했다.

한미 FTA 저지 범국본 정책위원회는 이날 곧바로 보도자료를 내 “한미 FTA는 미국에만 유리해야 하는 불평등 협정임이 분명해졌다”며 “이제 한국은 ‘FTA 허브’가 아니라 ‘FTA 동네북’이 됐다”고 지적했다.

또 “정부가 제시한 (한미 FTA로 인한) 무역수지이익의 95% 이상이 자동차 부문에서 나오는 것으로 돼 있는데, 이번 협상으로 (정부가) 자랑해온 이익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지적했다. 이제 기존에 정부가 강조하던 자동차 분야 이익은 관세부문 조정으로 사라졌다는 말이다.

한국 정부가 그나마 손 봤다는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제도에 대해서도 “미국은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한 후 파나마, 콜롬비아와의 FTA에서는 이 조항을 삭제했다”며 “한국만 이 조치가 삭제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얻어왔다는 이익이 결국 전혀 없다는 얘기다.

범국본은 “국민 생활에 악영향을 미칠 조항이 그대로 포함된 한미 FTA를 저지하고 통상협정에 대한 민주적 통제력을 회복하겠다”며 향후 기자회견을 갖고 긴급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