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건강보험’, 통합재정 위헌 결정나면…
헌법소원 최종 변론…”보장성 하향되고 보험료 올라갈 것”
기사입력 2011-12-09 오전 7:33:33
‘통합 국민건강보험’ 체제의 존폐를 가를 수도 있는 위헌 심판의 마지막 변론이 8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이뤄졌다. 경만호 대한의사협회 회장을 비롯한 7인은 지난 2009년 6월 “건강보험 재정을 통합해서 직장 가입자의 평등권과 재산권이 침해됐다”며 헌법소원을 청구했었다.
공단 “건강보험 쪼개면 사회연대 실현 불가”
보건의료 전문가들은 이번 헌법소원을 두고 “전형적인 건강보험 쪼개기 시도”라고 반발해왔다. 건강보험 재정 통합이 위헌이라고 결정될 경우 지역가입자와 직장가입자의 재정이 쪼개진다. 그런데 지역가입자들 중에는 소득이 없는 노인이나 영세민이 많다. 이 때문에 건강보험 재정이 분리되면 사회보험의 핵심가치인 ‘사회연대성의 원리’가 깨진다는 지적이 일었다.
이해관계인인 보건복지부 장관과 국민건강보험공단 측은 이날 공개변론에서 “국민의 생애주기를 살펴보면 대개 젊었을 때 직장가입자였다가, 나이가 들면 소득이 없는 지역가입자로 옮겨간다”며 “젊고 건강할 때 보험료를 많이 내서 늙고 병들었을 때 혜택을 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해관계인 측은 “청구인들의 요구는 가난한 집단에 대한 재분배 기능을 재고해달라는 것인데, 이를 받아들이면 사회연대 원리에 의한 소득 재분배 기능이 박탈되고, 전 국민 건강보험이 붕괴될 것”이라며 “가입자 개인으로 봐도 고소득자는 보험료 부담이 낮아지고, 저소득층은 보험료 부담이 높아져 건강보험이 사회보험으로서의 기능을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8일 오후 2시 의료민영화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등 47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헌법재판소 앞에서 ‘의료민영화 중단과 건강보험 지키기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경만호 의협 회장 “건강보험 부과 기준 불평등해”
반면에 청구인인 경만호 대한의사협회 회장 측은 “직장가입자가 월급에 근거해 건강보험료를 투명하게 내야하는 것과는 달리, 지역가입자의 소득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며 “건강보험공단이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의 재정을 함께 사용하면서, 보험료 부과 기준을 달리해 부담 불평등이 일어나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지역가입자에 대한 보험료 부과기준인 ‘보험료부과점수’는 실제소득이 아니라 추정소득”이라며 “현행 보험료부과점수 산정기준은 자의적”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소득이 파악되는 직장가입자가 소득이 파악되지 않는 지역가입자의 보험료를 부담할 수밖에 없어 직장가입자의 평등권과 재산권이 침해된다”고 주장했다.
청구인 측은 “일부에서는 이 사건 헌법소원이 건강보험 재정통합을 분리하고, 건보공단을 해체하고, 종전의 제도인 지역조합주의로 회귀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며 “하지만 우리는 보험료 부담의 형평이 실현되지 않음을 문제 삼을 뿐”이라고 밝혔다.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논리적으로 건강보험 체계를 분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통합된 건강보험 재정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건강보험 통합 전, 부자 조합 따로 가난한 조합 따로”
위헌 결정이 나면 현행 건강보험 체계에 어떤 변화가 일까. 이날 오후 2시에는 의료민영화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등 47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헌법재판소 앞에서 ‘의료민영화 중단과 건강보험 지키기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건강보험 재정이 분리된 후의 상황은 건강보험이 통합되기 전의 상황을 보면 된다”고 지적했다.
이 자리에서 조경애 건강세상네트워크 공동대표는 “2000년 건강보험이 통합되기 전에는 삼성과 중소기업이, 강남구와 구로구의 의료보험조합이 쪼개져있었다”며 “가난한 의료보험조합은 재정 적자에 허덕였고, 부자 조합은 (가입자들이) 건강해서 오히려 흑자이면서도 보험료도 적게 냈다”고 지적했다.
의료보험조합마다 보장성도 달랐다. 가입자가 어느 조합에 가입했는지 여부에 따라 혜택이 다르다는 장벽이 있었다. 조 공동대표는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건강보험 통합 덕분에 보장성을 전 국민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며 “위헌 결정이 나면 과거 수백 개의 의료보험조합 시절로 돌아가는 후퇴가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건강보험 보장성 하향 평준화될 것”
이와 관련해 보건의료 관계자들이 내다보는 시나리오는 두 가지다. 우선 건강보험 재정이 분리돼 취약해진 만큼 건강보험 보장성이 떨어질 우려가 높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지역가입자 중에 50대 이상은 59%, 미취업자가 40%, 취업자 중 비정규직이 67%로 지역가입자는 대부분 가난하고 고령인 분들”이라며 “재정을 분리하면 건강보험 보장성이 지역가입자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되거나 지역 보험료가 대폭 올라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더 큰 우려는 건강보험을 민영화할 단초가 제공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우 실장은 “직장보험의 일부를 떼어 민영화하거나, 지역보험이 재정난을 줄이려고 민간업체에 위탁운영을 시범 실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렇다 보면 의사협회가 목표로 하는 ‘건강보험과 민영보험이 경쟁하는 다보험체제’로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의사협회 부설 정책연구소가 지난 4월에 낸 ‘국민건강보험공단의 효율적 관리운영체계 개발’이라는 보고서는 “다보험자 체계의 구축은 규제된 경쟁적 보험체계를 만들기 위한 가장 필수적이고 선행적인 요소 중 하나”라며 그 방안으로 “현행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지역본부와 지사를 활용하거나, 대체형 민간보험자를 활용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관련 기사 : “밖으론 FTA, 안으론 ‘건보 쪼개기’…MB식 의료민영화 꼼수”)
우 실장은 “의사가 국민 건강을 지키려고 해야지 건강보험 보장성을 낮추고 건강보험을 쪼개겠다고 헌법소원을 내야하느냐”라면서 “경만호 대한의사협회장은 지금 자기가 지역에 가난한 사람보다 보험료를 더 낸다고 위헌 소송을 걸었다. 의사협회가 이러면 안 된다. 같은 의사로서 부끄럽다”고 말했다.
▲ 8일 오후 3시30분 대한의사협회가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헌법소원 취지의 왜곡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경만호 대한의사협회 회장(가운데). ⓒ대한의사협회
경만호 “헌법소원은 의료민영화와 상관 없다”
이에 대해 경만호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이날 3시 30분 같은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의료민영화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간 나를 포함한 청구인들이 제기한 헌법소원 청구의 취지를 왜곡해왔고, 오늘도 헌법재판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며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정치적 외압은 있을 수 없다. 이는 헌재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판했다.
경 회장은 또한 “국민건강법 일부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은 의료민영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며 “헌법소원 심판 청구는 국민건강보험을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건강보험의 지속 가능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건보 재정 통합 자체가 독자적인 위헌은 아니다?
“이럴 거면 헌법 소원을 왜 걸었지? 시행령만 바꾸면 될 걸…”
‘국민건강보험 재정통합 사건’을 상대로 한 최종 변론이 끝난 이날 오후 7시. 헌법재판소에 남아있던 기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청구인 측이 ‘건강보험 재정 통합이 직접적인 위헌 요인은 아니다’라고 기존 입장의 뉘앙스를 바꾸면서다.
이번 헌법소원 심판대상은 “공단은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의 재정을 통합해 운영한다”고 규정한 국민건강보험법 33조 2항,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의 보험료 부과기준을 다르게 산정한 국민건강보험법 62조 4,5항, 63조 1항, 64조1항, 65조 3항이다.
재판부가 “청구인이 건강보험 재정 분리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청구인 측은 “보험료 부과에서 평등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재정 통합 (관련 조항)도 논리적으로 위헌이 된다는 뜻”이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재판부는 “건강보험 재정 통합 자체가 독자적인 위헌이 아니라면, 헌재가 왜 (건강보험 재정을 통합해야 한다고 규정한) 국민건강보험법 33조 2항을 심판대상으로 삼아야하는지 생각해야 한다”고 부정적인 의견을 표시했다.
청구인 측은 “현재 직장가입자는 실소득을 근거로, 지역가입자는 추정소득을 근거로 이원적으로 보험료를 부과한다”며 “지역가입자도 추정소득이 아니라 실소득을 파악한 후 보험료를 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역가입자가 실소득을 신고하고, 건보공단은 실사를 통해 지역가입자의 소득을 파악해 보험료를 부과해야 한다”며 “지역가입자가 신고하는 소득에 대해서 국가기관에서 실사 기법만 제대로 개발한다면, 그들도 소득에 따른 보험료가 나오기 때문에 불평등 문제가 안 나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재판부는 “(공단이 지역가입자의) 소득을 부실하게 파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현행 건강보험법 때문인지, 법의 취지에 맞게 (공단이) 집행을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를 물은 뒤, “보험료율을 (불평등하게) 산정하는 요인이 시행령 때문이라면 청구인은 왜 법의 위헌성을 주장하느냐”고 추궁했다.
재판부는 “자영업자는 소득이 명백하게 잡히지 않는다. 국세청도 소득을 제대로 파악 못해서 특별 세무조사 등 비상적인 수법을 통해서 소득을 찾아내는 판국”이라며 “징세를 목적으로 하는 전문기관도 못하는 업무에 대해서 공단이 지역가입자들의 (신고만으로) 소득 재산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김윤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