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하나의 석유전쟁’ 체첸의 비극

‘또하나의 석유전쟁’ 체첸의 비극

온 세상이 지옥도(地獄圖)와도 같은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 앞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사이, 지구상의 다른 지역들에서 벌어지는 참극은 간과되고 있다. 그 하나가 체첸인들과 러시아 사이의 분쟁이다. 체첸인들의 나라인 체치니아는 러시아연방 내 공화국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데, 지난 5월9일에는 친러파인 카디로프 대통령이 경축행사장 폭발사고로 암살당했다. 사건 주도자는 체치니아 독립파인 ‘반군’인 것으로 보이며, 러시아 정부는 사건 직후 카디로프의 장남인 젊은 람잔을 제2인자인 부총리로 임명했다. 독립파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체치니아 정국이 ‘정상화’되었다던 그 간의 러시아 쪽 발표와는 달리 유혈분쟁은 계속될 듯하다. 두차례의 전쟁, 체치니아 분리주의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초강경책에도 불구하고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데에는 크게 두 요인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체첸인들의 독립정신과 러시아 대국주의의 충돌이다. 러시아 정부는 자국 내 민족문제가 워낙 복잡한 까닭에 소수민족들의 분리독립운동이라는 연쇄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일체의 원심적 경향을 원천봉쇄하려는 데 반해, 체첸인들은 종속을 거부하는 강렬한 독립적 기질의 소유자들인지라, 원칙·기질의 차이로 인한 양자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카프카즈산맥 한 가운데 위치한 인구 130만명의 작은 나라 체치니아가 정교 사회인 러시아제국에 복속된 것은 19세기 중반이었다. 대개 이슬람 신도인 체첸인들은 그때까지 러시아 군대에 맞서 끈질기게 투쟁하였으며, 당시 많은 러시아인들조차 이들의 독립성과 용맹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러시아 복속 후에도 체첸인들의 고난과 투쟁은 이어졌는데, 소련의 와해 이후 이들이 독립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런 한편 체첸 독립파와 러시아 정부의 대결을 사생결단의 싸움으로 몰아가는 현실적 요인으로는 석유가 있다. 체치니아는 한때 러시아제국 최대의 석유산지 중 하나였고, 지금도 러시아 전체 석유 매장량의 약 5%가 이곳에 묻혀 있다. 고급 정유시설도 있다. 그런데 러시아 쪽이 이보다 더 중시하는 것은 송유관 통제권이다. 체치니아의 수도 그로즈니는 중요한 석유산지인 바쿠, 카자흐스탄 등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송유관들의 교차중심(허브) 구실을 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 연안의 석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를 거치지 않은 채 체치니아로부터 바로 송유관을 서방으로 연결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체치니아 독립을 바라는 데 반해, 러시아 정부는 친러파 체첸 정부를 안정시키고자 진력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석유를 발견·개발하고 송유관을 설치한 자국의 역할이 부정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태도이다. 지구 최대 국가와 산간 소국 간의 대립이 악순환만 거듭하는 데는 석유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이렇듯 복잡하다는 사정이 작용하고 있다. 이 순간에도 반러파 체첸인들에 대한 납치, 고문, 살해가 자행되고 있건만, 유엔 인권위조차 체치니아 인권결의안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라크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약소국 국민들에게는 석유나 송유관이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되고 있다. 러시아나 미국이나 자국 영토 안에 엄청난 석유 매장량을 가진 나라들이다. 그런데도 자국산 석유 개발은 석유무기화를 위해 제한한 채, 중동, 중앙아시아, 카스피해 연안 등지에서 석유를 확보하고자 군사력을 쏟아붓고 있다. 강대국들의 끝없는 석유소유욕이 온 천지를 전쟁과 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석유 매장량에는 한계가 있다. 앞으로 60년이면 전 세계 석유는 동이 나리라 한다. 인류는 그때까지 계속 석유를 둘러싸고 아수라장을 연출할 것인지 지리적으로 국한된 생산지에 의존치 않는 에너지원을 개발하는 것은 국제평화를 위해 참으로 절실하건만, 그저 꿈만 같은 이야기인지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체첸인들에게 하루빨리 평화가 찾아들기를 기원한다.

한정숙/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