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는 변하지 않았다.

지난 7월말부터 워싱턴 D.C.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CSIS) 객원연구원으로 와 있는 필자는 북핵 문제와 동아시아의 질서재편, 미국의 외교 정책 등과 관련된 현안들을 다룰 <워싱턴 리포트>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워싱턴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국제문제 전문가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은 필자는 <워싱턴 리포트>를 통해 네티즌들과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은 생각에서 온라인 칼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연재하게 될 <워싱턴 리포트>는 워싱턴의 ‘코리아 워쳐’로 불리는 한반도 전문가를 비롯한 싱크 탱크의 연구원, 관료, 의회 관계자, 학자, 언론인 등과의 논의를 토대로 워싱턴의 기류와 시각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부시는 변하지 않았다?

북핵문제가 6자회담의 재개를 통한 협상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습니다. 북한의 지난 10월 7일 핵실험 이후 한반도를 뒤덮고 있던 짙은 먹구름도 곧 걷힐 것 같은 기대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11월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의회의 상하원을 모두 장악한 이후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거부해온 부시 행정부에 대한 대화 압력이 가중되고 있는 점도 낙관적 전망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중국의 베이징에서는 6자회담의 재개를 위한 막후 협상이 긴박하게 진행됐습니다. 12월16일 이니 18일이니 하는 6자회담 재개의 구체적인 날짜도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는 등 뭔가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북한과의 직접 협상을 한사코 거부해 오던 미국이 태도를 바꿔 중국을 참석시키는 방식으로 사실상의 양자 협상을 베이징에서 진행한 것도 긍적적인 전망을 낳는 조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 워싱턴의 분위기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여전히 북핵 문제의 타결 전망을 어둡게 보는 전망이 폭넓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북핵 문제를 보는 부시 대통령의 기본 시각에 전혀 변화의 조짐을 찾아볼 수 없으며 딕 체니 부통령을 비롯한 북핵 강경론자들이 여전히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의론자들은 부시 대통령의 임기 중에 타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반도 문제에 정통한 전문가일수록 비관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얼마전까지 국무부의 한국과장을 지낸 바 있는 데이비드 스트라우브(David Straub) 존스홉킨스 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는 “부시 대통령의 북한 입장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기 때문에 그의 임기 중에 북핵 문제가 타결되는 일을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민주당 계열의 싱크탱크인 미국진보센터(Center for American Progress)의 조지프 시린시온(Joseph Cirincione) 국가안보담담 수석부소장은 “이라크 및 이란 문제의 해결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은 북핵 문제는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타결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2년 뒤의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이 재집권하려면 대외정책에서 뭔가 가시적 성과를 제시해야 하는데 북핵 문제를 빼고는 부시 정권이 가시적 성과를 낼 대상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을 막후에서 조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얼마 전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을 만났을 때 “북한문제는 다른 외교현안에 비해 사안이 비교적 단순하다. 이를 외교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중국을 비롯 주변 국가들이 모두 북핵문제의 해결을 지지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해결 의지만 있다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에게 충성심이 강한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이 부시 대통령을 위해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고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시린시온 부소장은 내다봤습니다.

부시와 체니가 최대의 장애물

이처럼 북핵 문제의 전망을 둘러싸고 낙관론과 회의론이 교차하고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미국의 입장이 명쾌하게 정리돼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재 이라크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미국이 북핵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없는 점도 북핵 문제의 혼선을 가중시키는 한 요인입니다. 중간선거 이후 북핵 문제를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대원칙은 섰지만 타협을 성사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해법은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부시 대통령과 체니 부통령 등 미국의 최고 권력자들의 강경한 북핵 인식도 북핵 위기의 해소를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비록 핵실험에 성공했지만 미국 본토를 공격할 장거리 대륙간 탄도탄에 탑재할 수준의 기술은 아니며 북한핵의 외부유출을 봉쇄시킬 수 있다면 미국에게는 직접적인 위협으로 느끼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인식에 변화가 없는 한 미국이 북한을 매료시킬 수 있는 대북 양보책을 들고 나올 가능성이 희박해 보입니다.

실제로 북한이 10월 7일 핵실험을 강행한 이후 미국의 행보는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핵실험 직후 미국은 북한이 핵시설을 동결하지 않을 경우 북한과의 대화는 없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나 한 달도 채 못 돼 중국이 베이징에서 북한과의 3자접촉을 제안했을 때 미국의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는 베이징으로 달려가서 아무런 전제조건을 달지 않은 채 북한의 6자회담 복귀에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과의 베이징 2차 접촉에서 북한쪽에 영변 원자로의 동결을 포함한 선결조처들의 이행을 6자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같은 현실을 감안할 때 베이징에서 12월내로 6자회담이 재개된다고 하더라도 북핵 문제가 타결되기까지는 상당한 진통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언제 어떤 방식으로 북핵문제가 절충될 수 있을지는 매우 불투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무부의 불만

조지타운 대학 아시아센터 소장인 데이비드 스타인버그(David Steinberg) 교수는 최근 베이징 북-미-중 접촉을 비롯한 일련의 대화 움직임이 미국 국무부의 내부 기류 변화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스타인버그 교수에 따르면 국무부 내부에서는 딕 체니 부통령과 도날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중심으로 한 대북 강경파의 대북 정책이 사실상 미국의 대북정책을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는데 대해 불만이 팽배해 있었는데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참패를 계기로 대북 직접 협상론이 힘을 얻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라이스 국무장관을 크리스토퍼 힐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를 중심으로 한 대북 협상론자들이 최근의 베이징 북미 접촉을 비롯한 일련의 협상론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타인버그 교수는 “국무부의 이같은 기류 변화는 ‘미미한 수준’(slight)에 불과하지만 중간 선거 이후 부시 행정부에 가해지는 의회의 압력 등을 감안할 때 주목할 만한 변화라고 평가했습니다. 국무부의 대북 협상론자들은 북한의 핵포기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테러리스트 지정국 해제,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관 가입, 대북 금융제재의 해제, 각종 경제 원조 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가중되는 미 의회의 대화압력

핵전문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조지프 시린시온 부소장은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함에 따라 새롭게 구축된 미국의 정치지형이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대화와 협상쪽으로 선회하도록 만드는 견인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시린시온 부소장은 톰 란토스(Tom Lantos) 제관계위원회 위원장 내정자를 비롯해 대북 협상을 강조하는 민주당 의원들이 상당수 원내에 진출함에 따라 부시 행정부는 기존의 대북 강경노선을 고집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또 국방장관에서 해임된 도날드 럼스펠드를 비롯 대북 강경론자들이 부시 행정부에서 축출됨에 따라 대북 강경세력들의 위상이 크게 약화된 점도 대북 협상론자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줄 것으로 그는 전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북한이 미국과 과연 협상을 통해 핵무기 프로그램의 전면적인 폐기 의지를 갖고 있느냐이라고 그는 지적했습니다.

부시의 무능과 무지가 문제

미 국무부에서 30년간 근무한 뒤 부시 대통령의 대북 강경책에 반발해 조기퇴직한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교수는 미국의 대북 정책이 표류하고 실패하고 있는 것은 라이스 국무장관이나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 등 실무자의 책임이 아니라 바로 부시 대통령의 무능과 무지, 식견부족 때문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스트라우브 교수는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북 인식과 정책에 관한 한 부시 대통령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매우 고집이 센 사람이며 북핵정책이 실패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은 전혀 믿을 수 없는 집단이라는 확고한 인식을 갖고 있으며 북한이 핵실험은 그 인식이 옳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핵문제를 유화정책으로 해결할 없다고 그는 믿고 있다. 북한과 대화하기 전에 북한이 먼저 미국이 신뢰할 수 있도록 뭔가를 행동으로 보여 주여야 한다고 부시 대통령은 생각한다. 전혀 믿지 못하는 북한에게 위협에 굴복해 각종 경제적 혜택을 줄 수 없다는 부시 대통령의 생각은 확고하다고 본다. 북핵 문제이 타결 가능성은 리비아의 경우처럼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하고 이를 가시적으로 보여줄 경우 미국은 조금씩 단계적으로 대북 지원책을 제공하는 방안에 북한이 합의할 때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스트라우브 교수는 부시 대통령의 이런 인식에 대해 코웃음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이라크의 사태 진전을 보면서 북한은 미국이 무력할 뿐만 아니라 북한에 대해서도 군사적 공격을 할 수 없다는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기 때문에 미국에 대해 먼저 양보하지 않고 기다릴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핵실험에 성공한 북한은 핵포기에 대해 미국이 이전보다 더욱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북한에게 먼저 양보하라는 것은 협상타결의 의지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스트라우브 교수는 부시 대통령의 대북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으려면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처럼 부시 대통령 집안과 친밀한 중량급 인물이 부시 대통령에게 인간적 신뢰를 바탕으로 북핵문제의 포괄적 해결방안을 조언할 때 가능한 데 현재 그런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네오콘 강경파가 대북협상 방해

스트라우브 교수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참패를 패배로 이라크 침공 및 점령, 대북 강경노선을 주도해온 네오콘들의 입지가 크게 약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그 잔당들이 국무부, 백악관의 국가안보위원회(NSC), 국방부 등 주요 보직에 남아서 대북 강경정책을 주도하면서 북핵 해결을 위한 협상의 진전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국무부의 로버트 조지프(Robert Joseph) 군축국가안보담당 차관 (Under Secretary of Arms Control and International Security), 국가안보위원회(NSC)의 잭 크라우치 2세(J.D. Crouch II) 국가안보담당 부보좌관(Assistant to the President and Deputy National Security Adviser), 재무부의 스튜어트 레비(Stuart Levey) 테러금융정보담당차관(Under Secretary of Terrorism & Financial Intelligence-Terrorist Financing)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여전히 대북 협상타결을 막기 위해 각종 방해공작을 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조지프 군축국제안보 부차관은 얼마전 유엔대사직 사임의사를 밝힌 존 볼튼이 역임했던 국무부 부차관직을 물려받은 인물로 국무부 내에서 대표적인 대북 강경파로 분류됩니다. 2001년 8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국방부 국제안보정책담당 차관보를 지낸 바 있는 잭 크라우치 2세는 상원군사위원회의 인준 청문회때 1994년 1차북핵 위기때 북한의 핵시설과 장거리 미사일 제조 시설에 대한 공습을 추진했어야 한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또 1994년 북미 기본합의를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 야합하려 했던 것이라고 비난한 적도 있습니다.

이들은 네오콘의 구심점인 체니 부통령의 심복들로서 합의를 통한 북핵 위기의 해소가 미국의 안보를 해친다는 논리를 주장하면서 이를 무산시키기 위해 긴밀하게 상호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9월 베이징 6자회담에서 북핵 문제의 포괄적 해결내용을 담은 919합의가 이루어질 즈음에  리차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과 함께 대북 금융제재 작업을 막후에서 주도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현재도 이들은 대북 금융제재의 해제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후퇴한 미국의 6자회담 전제조건

북한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Selig Harrison) 미국 국제정책센터(Center for International Policy) 선임연구원은 미국이 최근 베이징 3자 접촉에서 보여준 대북 양자협상의 자세는 중요한 태도변화라고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사실상 6자회담 재개의 전제조건을 북한에 요구함으로써 회담 전망을 매우 어둡게 만들었다고 진단했습니다.

셀리그 해리슨에 따르면 미국은 최근의 베이징 접촉에서 북한쪽에 북한이 영변 원자로를 동결시킬 경우 미국은 양자협상이든 6자회담이든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미국의 제안은 북한이 먼저 영변 원자로를 동결시키는 선행조처를 이행할 경우에 미국은 대북 경제 및 에너지 지원 방안을 ‘연구’(study)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뉴욕타임즈 등의 미국 언론들이 보도한 구체적인 경제지원책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셀리그 해리슨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셀리그 해리슨은 베이징 접촉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폐기를 요구하지 않았으며 구체적인 포괄적 경제지원책도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미국 언론들의 보도는 미국 국무부의 전형적인 언론플레이(spin)이라는 것입니다. 셀리스 해리슨은 미국의 이같은 요구는 2004년 1차 6자회담 당시 존 켈리 미국 대표가 북한에 제시한 바로 그 내용으로서 2005년 9-19베이징 합의보다도 훨씬 후퇴한 내용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미국의 양자협상 수용은 진전

셀리그 해리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지금까지 줄기차게 요구해온 북미 양자협상의 틀을 공식적으로(물론 중국을 포함한 3자 협상이라는 틀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양자 대화 형식긱을 수용한 것) 제시했다는 점에서 마냥 이를 거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셀리스 해리슨의 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미국이 부분적으로 신축성을 보였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미국은 이제 북한과 양자 회담의 용의가 있음을 제시한 셈이다. 이는 매우 긍정적인 변화이다. 북한은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대화기조를 유지하려 할 것이다. 북한은 일단 양자대화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그러나 미국은 매우 비현실적인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다. 북한이 이를 수용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6자회담이 조기에 재개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현재 미국과 막후 접촉을 통해 전제조건의 철회 등을 포함한 대화재개의 분위기 조성에 노력하고 있는 중국이 미국을 설득할 수 있느냐와 북한을 설득해 미국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도록 설득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다시 중국의 역할이 주목되는 상황이 됐습니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표면화되고 있는 중국의 주도적인 역할은 냉전종식이후 가속화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질서재편과 밀접하게 맞물리면서 기존의 동아시아 안보지형에 지각변동을 가져오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은 면밀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보다 구체적으로 다룰 생각입니다.

미국의 동아시아 무관심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북핵 문제는 중요한 현안가운데 하나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라크 사태 등 중동지역과 관련된 사안들에 비해 우선순위에서 크게 밀려나 있습니다. 얼마전 이곳을 방문해 존스홉킨스 대학 부설 코리아유에스 연구소에서 북한 핵문제에 대해 특강을 했던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당의장은 북핵 문제가 미국의 대외정책 우선순위에서 7-8위 정도로 밀려나 있어서 해결을 한층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 대외 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중동지역에서의 헤게모니 장악으로 압축됩니다. 이에는 미국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안전보장 문제와 함께 석유자원의 확보라는 전략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북한에도 석유가 대규모로 매장돼 있다면 미국은 이라크 침공에 이어 핵무기 개발을 명문으로 무력공격을 강행해 점령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현재 미국의 대외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네오콘들에게 북한은 공격해 점령해봤자 건질 것이 없는, 헐벗고 굶주린 약소국가일 뿐입니다. 미국에 부담만 되지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네오콘들은 보고 있는 것입니다. 냉전체제 하에서 한반도는 미국의 사활적 이해가 걸린 전략지역으로 간주됐지만 냉전체제가 붕괴된 이후 미국의 관심사는 중동지역으로 넘어갔습니다.

미국의 중국 의존 전략

대신 미국은 동아시아는 중국에 맡겨 관리한다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중국중심 동아시아 전략에서 최대의 걸림돌은 역사문제 등을 둘러싸고 전개된 한국-중국과 일본의 심각한 갈등 대립관계였습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반목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동아시아 전략에 중요한 장애물이었습니다. 미국이 일본에 대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줄기차게 요구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는(물론 이는 고이즈미가 주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재임기간 중에 일어나 한국 및 중국과의 관계 악화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등 미국의 기대에 역행하는 노선을 견지했습니다.

아베 신조총리는 미국이 ‘간택한’ 인물이라는 측면도 있습니다. 미국은 아베 신조가 총리에 취임하기 전 비공식적 채널을 통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강력히 주문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베는 총리 취임직후 일본의 총리로서는 이례적으로 첫 해외순방국으로 중국을 선택해 베이징으로 가서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열었습니다. 아베 총리는 후진타오 총리와 만나 두 나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숙원사업이 해결된 셈입니다.

아베가 베이징을 방문하던 바로 그날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했습니다. 북한의 핵실험은 껄끄러운 사이였던 중국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에 일종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핵 문제가 부상하면서 관계 개선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야스쿠니 신사문제는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후진타오 주석과 아베 총리는 한목소리로 북한을 성토함으로써 유대를 과시했습니다. 아베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를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렸지만 북핵 덕분에 잘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중국도 아베의 애매모호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북한 성토를 통해 국제적 관심을 분산시킬 수 있었던 셈입니다. 이렇게 북한의 핵실험은 중일의 새로운 제휴에 윤활유 역할을 한 것입니다.

북한의 핵실험에 미소짓는 네오콘

북한의 핵실험은 미국에게도 반드시 재앙만은 아니었습니다. 북한 체제 붕괴론자들에게 북한 정권 붕괴의 당위성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패배로 네오콘으로 불리는 북한체제 붕괴론자의 입지가 크게 약화된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그러나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함에 따라 미국에서 북한의 핵문제는 이제 한반도의 문제 또는 동아시아 문제라는 지역적 차원을 넘어 미국의 세계전략의 문제로 그 성격이 변질됐습니다.

대북강령세력들은 현재의 상황이 결코 불리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안보리 재재에 찬성하는 등 미국의 입장에 조금씩 접근하고 있고 한국도 부분적으로 대북 지원의 범위를 축소하는 등 북한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현상황을 그대로 오래 끌고 가면 북한 정권의 붕괴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네오콘을 비롯한 미국의 강경론자들은 물론이고 네오콘을 비판하는 공화당의 현실주의자들과 민주당 인물들은 내심으로 북한 핵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체제붕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

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현재 공화당과 민주당이 북한을 다루는 방식을 놓고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북한 핵문제의 근본적인 처방으로 북한 정권의 붕괴를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붕괴론은 핵무기를 일단 확보한 북한이 결코 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북한체제 붕괴론자들에게 유엔안보리의 1817 제재와 금융제재는 그 수단입니다. 6자대화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는 알 수 없지만 대북강경론자들은 유엔안보리의 대북결의와 금융제재 카드를 통해 장기적으로 북한체제를 압박하려고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역사적으로도 핵무기를 개발한 국가가 자발적으로 또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이를 포기한 사례가 없다는 점도 북한체제 붕괴론의 한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핵포기와 정권교체

1980년대에 핵폭탄 6개를 제조하는 데 성공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핵무기를 해체한 것은 백인정부가 더 이상 인종차별 정책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흑인들에게 정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게 되자 정권 인수를 앞두고 백인정부의 드 클레르크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핵무기 해체를 결정했습니다.

대통령에 취임했던 만델라 대통령은 처음에는 핵무기 해체에 반대했으나 미국 등의 설득에 힙입에 전 정권의 결정을 수용했습니다. 만약 드 클레르크 대통령이 이끄는 백인정권이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핵무기 해체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시, 카자흐스탄 등 전 소련공화국의 일부였던 핵무기 보유국가들도 소련의 해체로 독립한 이후 경제적 보상을 받고 핵무기를 러시아로 이관했습니다.

이들 국가들의 공통점은 모두 정권교체 또는 체제교체라는 역사적 전환국면 속에서 개발한 핵무기를 포기한 데 있습니다. 북한 체제 붕괴론자들은 이 사례들을 근거로 북한핵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체제붕괴로 삼고 있습니다. 물론 북한의 경우 중국을 비롯해 한국과 러시아 등이 북한 정권의 붕괴를 모두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강경론자의 전략이 관철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미지수입니다. 앞으로 있을 6자회담은 협상타결을 추구하는 대북 현실론과 장기적으로 북한 정권 붕괴론을 목표로 하는 강경론이 격돌하는 무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워싱턴/장정수 논설위원-국제전략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출처: 한겨레신문 인터넷에서, 2006.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