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보고 2007 반전평화팀 활동보고

2007년 <보건의료 반전평화팀> 활동보고
                                                                                                    작성: 2008. 1. 10

<보건의료 반전평화팀>은 보건의료단체연합 내 상시적이고 지속적인 반전평화 운동을 건설하기 위해 2006년 하반기에 구성되었다. 당시 소수의 팀원(3명)으로 시작한 <반전평화팀>은 반전 집회와 토론회, 행사 등을 보건연합 내에 알리는 선전활동에서 시작했고, 팀원 확보에 나서 2007년 초까지 20명에 가까운 팀원들을 확보했다.

반전평화팀 2007년 첫 회의 및 1월 활동
2007년에 들어 첫 팀 회의가 1월4일에 있었고, 회의에 12명이 참가해 보건의료 반전평화 운동에 대한 각자의 상을 공유하고 앞으로 한해 보건의료 내에서 지속적인 반전평화 운동을 벌여나가기로 했다. 또한 3월 초 보건의료 반전평화포럼 개최와 3.17국제공동반전행동에 참가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1월 중에는 길벗과 늘품이 함께하는 평택 대추리 주민 진료에 반전평화팀으로 백남순, 이명하가 참여했고, 1월20~25일 케냐에서 있은 제7차 세계사회포럼에 이미진, 심도식이 다녀왔다. 특히 세계사회포럼에서 열린 반전총회 참가는 보건연합 내 많은 이들에게 국제반전운동에 대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1월25일 진행한 반전평화팀 회의에는 3명만이 참가해, 3.17반전행동 참가조직과 보건의료 반전평화포럼 개최에 대한 실무적 논의만을 진행했다.

2월 활동: <보건의료 학생겨울캠프> 참가와 “보건의료 반전행동” 제안
반전평화팀은 2월9일~11일 있은 <보건의료학생 겨울캠프>에서 반전캠페인을 진행했으며, “세계사회포럼이 보여준 반전운동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주제토론을 열기도 했다. 반전 주제토론에는 10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해 반전평화에 대한 진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겨울캠프 이후 2월22일에 반전평화팀 회의를 진행했고, 10명이 참여한 이날 회의에서 “보건의료인 반전평화행동”이 제안되었다. 당시 반전평화행동의 제안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4년을 기해서 보건의료부문 내에서 반전여론을 더욱 확산시키고 보건의료인들이 반전평화 행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건의료인 반전평화행동”으로는 첫째 <3.17국제공동반전행동> 참가단 구성, 둘째 <2007 반전평화포럼> 개최, 셋째“병의원, 약국, 대학에서의 반전행동”, 넷째“모든 이들이 할 수 있는 반전행동” 다섯째“3.17 반전행동 후원 모금”등이었다. 팀 회의 이후 반전평화팀은 보건연합 소속단체, 보건의료 관련 단체와 학생 단체,단위 등에 “보건의료인 반전평화행동”을 제안했으며, 이를 선전홍보하는 활동 등을 벌였다.

월 활동: 윤장호 병장의 죽음과 3.17국제공동반전행동 참가
2월27일 갑작스런 아프간 파병 한국군인 윤장호 병장의 사망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분노를 자아냈고, 파병한국군 철군 여론을 고조시켰다. 이에  반전평화팀은 시급히 성명을 초안작성했고, 보건연합에서 성명을 발표했다. 반전평화팀은 윤장호 병장의 죽음의 책임이 부시의 침략전쟁과 노무현 정부의 파병정책에 있다고 주장하며 파병 한국군 철군 호소에 나섰고, 3월5일 있는 “윤장호 병장 추모 촛불문화제” 등의 집회에 참가했다.
  국내에서는 철군 여론이 고양되고 있었으며 국제적으로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 4년을 기해  ”3.17 국제공동반전행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반전평화팀은 “2007년 보건의료 반전평화포럼” 개최와 “3.17 국제공동반전행동” 참가단 구성을 알리기 위해 각 대학에 포스터와 선전물 등을 배포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계획했던 병의원,약국,대학 등에서 반전행동 홍보부스 설치는 진행되지 못했고 3.17반전행동 후원모금은 호응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3월16일 <2007년 보건의료 반전평화포럼>은 “두 바퀴로 가는 자본주의: 전쟁과 신자유주의”라는 주제로 박노자 씨의 초청 강연으로 진행했다. 참석자는 50여명이었으며, 박노자 씨의 강연은 포럼 참석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3.17 국제공동반전행동에는 <보건의료 참가단>으로 60여명이 참가했다. 이날 집회에서 <보건의료 참가단>은 사전캠페인을 진행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보건의료인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며 참가자들을 고무시켰다. 국내에서 벌어진 3.17 국제공동반전행동은 모두 성공적이었으며, 보건의료 참가단 또한 3.17반전행동의 자발성과 활력, 다채로움 그리고 집회행진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단호함 등에 크게 고무 받을 수 있었다.
  3월22일에는 “3.17국제공동반전행동 평가모임”이 진행됐다. 평가모임은 3.17 국제공동반전행동의 참가자들과 함께 정치적 의의를 나누고 앞으로의 활동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하였으나, 준비부족 등으로 인해 6명밖에 참여하지 않았다.
  3월29일부터 4월1일에 있는 카이로 국제반전회의에 이미진 씨가 참가했다. 반신자유주의 반제국주의 운동의 단결과 연대를 모색하는 자리였던 국제반전회의 이미진 씨의 참가는 반전평화팀의 활동 경험의 주요한 자산이 되기도 했다.

4-5월 활동: 팀 자체활동 저조
4월의 시작은 한미FTA 협상 타결을 앞두고 진보진영이 부산히 대응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허세욱 씨의 분신사망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로 남음과 동시에 노무현 정부에 대해 분노에 사무치게 했다. 반전평화팀 성원들 또한 한미FTA 반대 투쟁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결합하고 있었다.
  5월 중순에 들어 자이툰부대 오종수 중위 총기사망 사건이 발생해, 자이툰 주둔이 갖은 위험성이 사회적으로 다시 환기되었지만 철군 운동으로 분출되지는 않았다.
  4월, 5월 기간 동안 팀원 소수만이 모여 한차례의 실무회의를 진행한 것 이외에 5월말이까지 반전평화팀 회의는 수차례 연기됐다. 4월 초 한미FTA 반대 운동 등과 여러 일정 때문에 다소 부진했던 반전평화팀 활동이, 5월에 들어서부터는 상당히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반전평화 소식> 메일이 계속해서 발송되지 않는 등 심각한 문제를 나타내기도 했다.
  5월24일에야 열린 팀 회의에 8명이 참여했고, 이날 회의는 ‘보건의료 반전평화팀 활동 방향’을 논의하는 등 내실 있게 진행되었다.

6월 활동: 6.10반전행동 참가와 레바논 파병관련 간담회 개최 및 <철군보고서> 작성
6월말 정부의 자이툰부대 임무종결 계획서 제출을 앞두고 정부가 또다시 파병연장을 운운했고, 이에 항의하는 6.10 반전행동이 개최됐다. 이날 집회는 매우 시급하게 조직되었음에도 5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했고, 여느 때와 같이 집회 참가자들은 열의와 활력이 넘쳤다. 반전평화팀도 십수 명의 보건의료인들과 함께 참여해, 집회 사전 캠페인을 진행하는 등 열의를 보였고, 이미진 씨는 정리집회에서 보건의료 반전평화팀을 대표해 발언을 하기도 했다.
  파병반대국민행동은 6.10 반전행동 이어, <파병한국군 철군을 위한 보고서>를 국회 제출과 대중적 반전 선전을 위해 작성하기로 하였다. 반전평화팀도 보고서 작성에 참여해 “이라크 점령의 현실” 부분을 담당했다. 보고서 작성 참여는 ‘이라크 점령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보다 넓힐 수 있은 좋은 계기가 되어줬다. 이러한 활동에 보다 많은 팀원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6월 한국정부의 레바논 파병 계획이 구체화되기 시작하자, 반전평화팀에서는 6월20일 “레바논 사태와 특전사 파병”이라는 주제로 간담회를 개최했다. 간담회에는 십수명이 참가했고, 발제를 받은 ‘경계를 넘어’의 미니 씨로부터 제국주의의 레바논의 개입의 역사와 레바논의 정치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며 특전사 파병에 대한 부당함을 참여자 들이 함께 토론할 수 있었다.

7월-8월 활동: 아프간 피랍사태 발생에 따른 대응
7-8월 기간 동안에는 <한국사회포럼>, <맑시즘 2007>, <보건의료여름포럼>, <사회운동포럼>, <보건의료여름포럼> 등 다양한 행사 등이 있었다. 반전평화팀은 7월7일 실무회의를 통해, 대중적 행사에서 열리는 반전평화토론을 보건의료 부문 내에서도 알리고 참여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7-8월 기간, 이랜드 비정규직 대량해고에 따른 비정규직 투쟁이 분출했고, 아프간 한국군 피립사태 발생했다. 결국 반전평화팀은 <한국사회포럼>, <사회운동포럼>에는 일정 상 참여하지 못했으며, <맑시즘 2007>에도 반전평화팀 팀원 일부만이 개별적으로 참여했다. <보건의료여름포럼>에는 참여했으며 독자적인 활동은 진행하지 못했다. 또 7-8월 기간 반전평화팀은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는 평화사진작가 이시우 씨 지지활동 등도 계획되었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7월21일 아프가니스탄에서 21명의 한국인이 피랍되는 급박한 상황이 발생했다. 22일부터 무사귀환을 바라는 촛불집회가 연일 개최되었고, 반전평화팀원들은 촛불집회에 참가하며 이를 알리기 위해 분주히 활동했다. 보건연합은 즉시 ‘즉각 철군’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보건의료인과 학생 20여명이 7월23일에 있은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피랍사태는 한국의 반전운동 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아프간은 저항세력이 포로교환을 요구하자 이에 대한 수용여부를 두고 파병반대국민행동 소속단체들 간 의견이 대립했으며, 일부 단체들은 파병반대국민행동과 무관한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보건연합은 피랍자들의 무사귀한을 위해 한국정부가 포로교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파병반대국민행동 내에서도 이와 같은 주장을 펼쳤다. 반전평화팀은 실무회의를 진행하며 피랍사태에 대응한 활동들을 벌여 나갔다.
  파병반대국민행동이 개최한 8월10일 ‘포로교환을 요구 수용을 촉구하는 집중 촛불집회’에 반전평화팀은 보건의료인과 학생 30여명과 함께 참석했다.
  피랍사태 당시, ‘포로교환 요구 수용’을 두고 벌어진 반전운동 내 의견대립과 피랍에 대한 ‘기독교 책임론’이 계속됨에 따라 반전평화팀은 8월20일에 “아프간 피랍사태, 원인은 무엇이고 해결책은 없는가?”라는 주제로 긴급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간담회의 발제는 민주노동당 파병반대대책위 김어진 집행위원장이 맡았으며, 반전평화팀 팀원 등 10여명이 참석에 함께 토론했다.
  8월28일 피랍자 19명의 석방 합의가 이뤄져 41일간의 피랍사태가 끝을 맺었다. 그러나 정부의 파병정책으로 인한 심성민, 배형규 씨의 아까운 두 목숨이 희생된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또다시 각인되어졌다.

9월 이후: 반전평화팀 활동 정체
피랍사태 종결 이후 반전평화팀 활동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10월8일에서야 실무회의를 5명이 모여 진행해 하반기 활동을 계획했으나, 이후에도 계획했던 활동들은 전개되지 않았다. 특히 <반전평화소식>의 제작발송이 끊임없이 요구되었으나, 한 차례도 발송하지 않은 문제가 계속되어졌다.
  반전평화팀은 10-11월 중 파병재연장을 꾀하는 정부에 항의하는 성명 초안 작성한 것과, 10.28 한미공동반전행동, 11.18 자이툰 파병연장 저지를 위한 반전행동 등의 집회에 몇몇을 조직하여 참여했다. 이후 대선 정국과 연말로 가면서 반전평화팀 활동은 더욱 침체됐다.

지난한해 활동에서의 많은 부족함과 역량의 한계, 운영상의 여러 오류에도 불구하고 반전평화팀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반전평화팀은 작년한해 동안 벌어진 여러 주요 반전평화 사안들에 적절히 대처하며, 매우 크진 않더라도 작은 성과들을 남기며, 반전평화 운동에 기여를 했다.
  미국의 이라크-아프간 점령이 계속되고 한국정부의 파병정책이 존속되는 한 작년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윤장호 병장과 오종수 중의 죽음과 같은 일과 피랍사태와 같은 끔찍한 일이 또다시 발생할 것이다. 전쟁과 점령이 계속되는 한 반전평화 운동은 계속되야 하며, 보건의료 반전평화팀도 역할도 그만큼 중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