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선언문은 WTO하에서 민중의 최소한의 치료접근권을 보장받기 위한 보호장치였다. 선언문은 물론 여러 가지 쟁점이 있고,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건강이 무역협상보다 우선한다는 명제를 확인받았다. 그러나 도하선언문에 포함된 내용을 완전히 무로 돌리고, 의약품 접근권을 위한 돌파구를 전면 차단하는 조치들이 FTA(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주로 미국은 선진국, 개도국을 막론하고 전 세계 모든 지역과 FTA를 체결하기 위해 공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미국이 체결하였거나 협상중인 FTA들은 공통적으로 미국내법 혹은 미 국회에 제출되지도 않은 정책을 포함시켜 TRIPS협정보다 더 강력한 지적재산권 보호를 요구하고 있다(TRIPS plus). (미국과 체결되었거나 협상중인 FTA는 이스라엘, 요르단,칠레,싱가폴,모로코, 호주,남아프리카관세동맹, 중미공동시장, 남미공동시장, 미주자유무역지대, 태국, 도미니카공화국(타결), 페루, 콜롬비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바레인, 코스타리카 등이다. 살펴보면 대륙별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TRIPS보다 강력해진 조항들의 몇가지 중요한 예만 나열해보자.
FTA에서는 1)TRIPS의 20년이라는 특허 보호기간에 더하여 3~5년의 보호기간을 확대하도록 요구한다. 2)특허 출원후 3~5년간 강제실시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3)강제실시를 할 수 있는 조건을 TRIPS보다 더욱 엄격히 제한한다. 그리고 4)지적재산권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의무와 다양한 보호, 특허범죄에 대한 민사, 형사상의 처벌 강화를 요구한다.
즉,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값싼 약을 공급하기 위한 어떤 방법도 마련할 수 없게 된다. 현재 모잠비크, 짐바브웨,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태국 등 세계 곳곳에서 특허권으로 인해 값비싼 에이즈 치료제를 강제실시를 통해 국내에서 생산하여 싸게 공급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협상중인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나 남아프리카관세동맹과의 FTA가 체결된다면, 수백만명의 에이즈환자들은 약을 두고도 죽어갈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브라질의 ‘에이즈무상프로그램’이나 ‘호주의약품급여제도(PBS)’와 같이 국가 내에서 의약품을 더욱 싸게, 혹은 무상으로 공급하기 위한 기존의 제도를 붕괴시킬 수 있는 효과를 가진다.
각 나라의 사레별로 생각해보자.
[호주] 2004년 2월에 미국은 호주의약품급여제도를 미-호주FTA 협상 대상에 포함시켰다. 미제약협회는 가장 싸고 가장 효과적인 의약품 공급을 목표로 하고 있는 호주의약품급여제도가 신약의 시장진입을 차단하고, 지적재산권을 파괴한다고 주장했다. 호주 보건장관 토니 애보트는 호주의약품급여제도는 무역이슈가 아니고 협상의 부분조차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지만, 호주 하워드정부는 미제약협회의 손을 들어주었다.
[브라질] 브라질 정부는 애보트, 머크, 로슈사에서 판매하고 있는 세가지 에이즈 치료제가 ‘에이즈무상프로그램’에 드는 정부 예산 중 63%를 차지하자 40%이상의 약가인하를 요구했다. 하지만 제약회사가 이를 거부하자 브라질 정부는 강제실시를 통해 세가지 에이즈치료제를 브라질내에서 생산하거나 다른나라로부터 싼 제네릭 의약품을 수입하도록 하는 법령을 발표했다(2003.9) 결국 제약회사들은 에이즈 치료제 가격을 37%이상 인하하기로 합의했다(2004). 브라질 보건성은 2001년에도 로슈사의 에이즈치료제에 대한 강제실시권을 발동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40%이상 가격을 떨어뜨린 바 있다. 하지만 FTAA(미주자유무역지대협정)을 체결한다면 강제실시나 병행수입에 대한 브라질의 권리는 모두 소진될 것이다.
[모잠비크] 2004년 4월에는 모잠비크 정부가 ‘다국적 특허권자들이 모잠비크 민중이 감당할 수 없는 가격으로 에이즈치료제를 공급하여 약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한 점을 고려하여’ 모잠비크 제약사에게 강제실시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역시 아프리카와의 FTA가 체결된다면 실효성을 상실할 수 있다.
[중앙아메리카] CAFTA(중미자유무역협정)의 경우 브랜드 의약품이 세계 어느 곳에서 판매승인 되더라도 브랜드 제약사에게 5년간의 정보배타권을 보장해야 한다. 이는 최소 5년에서 최대 몇십년의 배타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한다. 만약 A제약사가 미국시장에 새로운 의약품B를 시판하고 온두라스에는 시판하지 않았을지라도 온두라스는 5년간 B의약품의 제네릭(카피약)을 승인할 권리가 부정된다. 그리고 5년후 A제약사가 온두라스에 B의약품을 시판한다면 그후 5년간 B의약품에 대한 정보배타권을 보장해야 한다. 따라서 온두라스는 B의약품의 정보배타권을 A제약사에게 10년간 보장할 수도 있게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B의약품보다 싼 제네릭(카피약)의 출시는 10년간 지연될 수 있다.
세계의약품 시장에서 가장 큰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미국은 제약자본의 입장을 가장 잘 반영해왔다. 미국은 WTO협상과정에서 지적재산권과 공중보건의 문제에 관하여 가장 비협조적이었고, 미통상법(스페셜301조)를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50여개국의 의약품관련 제도와 정책을 감시하고 지적재산권을 강화시켜왔다. 더 나아가 미국은 TRIPS(무역관련 지적재산권협정)나 UPOV(식물변종의 보호를 위한 국제협약)같은 기존의 다자주의 협정을 통합정리하고 WIPO(세계지적재산기구)의 새로운 협정과 같은, 미래의 지적재산권 관련 협정에서 미국의 협상지위를 강화하도록 FTA를 활용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미제약자본과 미보험자본이 각국의 의료시장에서 제한없이 돈을 벌 수 있도록, WTO TRIPS를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손쉽게 FTA를 통해 각국의 특허법과 의약품, 의료제도를 미국식으로 바꾸고 있다. 광범위하고 공세적인 미국의 FTA협상은 그 체결대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중의 의약품접근권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국이 원하는대로 FTA가 체결된다면 역사상 가장 강력한 특허권이 제약자본에게 보장되고 그만큼 우리의 건강권은 제약자본에게 종속될 것이다. 무엇보다 의약품 접근권을 위한 돌파구가 전면 차단될 것이다. FTA는 약을 눈앞에 두고도 죽어가는 환자들을 위해 국가수준에서 혹은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FTA는 TRIPS보다 훨씬 더 빠르고 깊숙하게 우리의 숨통을 죄어온다. 의약품 접근권을 파괴하는 FTA를 반드시 막아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