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로 내일, ‘전국 노점상 6.13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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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인의 축제라는 올림픽 대회가 88년 서울에서 진행되었다. 축제라는 것이 문화의식을 통한 국민대화합이라는 측면이 있지만 한편으로 정치적으로 이용될 경우 부도덕한 정권의 본질을 은폐하거나 국민의 의식과 시선을 왜곡하고 통합하는 기재로 악용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얼마 전에 막을 내린 “하이 서울 페스티벌”을 보라. 청계천을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노점상과 영세상인을 몰아낸 채 요란스럽게 울긋불긋 깃발을 내건 채 축제라니, 수많은 현지의 주민들을 내몬 자리에 공허하게 만국기만 나부끼는 게 축제란 말인가? 이명박 서울시장은 역기능과 드러나고 있는 부작용을 면피하기 위하여 허울 속의 축제라는 풍선을 띄우고 있는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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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군부독재는 이미 80년대 들어 올림픽을 추진하면서 산동네 판자촌을 불도저와, 철거 깡패로 밀어 버리고, 거리환경, 질서의 미명하에 강력하고 대대적인 단속을 전개하였다. 세계로 뻗어 가는 경제한국의 위상을 널리 선전하는데 길거리의 노점상은 눈에 가시였고 세계각국의 손님들이 참여하는 축제에 찬물을 끼얹는 치부였다. 승리의 v자를 치켜든 마스코트 ‘호돌이’ 의 방긋 웃는 미소 속에 노점상들은 침묵으로 가려졌다. 마침내 군부독재정권은 88년 6월 16일까지 노점상 전면 단속 발표를 통해 손수레 보관소의 폐쇄 등 강력한 제재를 공언하는 선전포고를 하였고 노점상들은 생계에 커다란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노점상들은 “도시노점상연합회”로 결집한 터라 조직된 노점상들의 반격이 곧바로 이어졌다. 그동안 성장을 거듭해 오던 노점상들은 전두환 정권의 노점단속 발표에 맞서 대대적인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88년 6월 13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약 3천여명의 노점상들이 모여 조직적으로 처음 치른 6.13대회였다. 이날 지도부는 노점상들이 하루를 쉴 것을 결정하고 “대책없는 노점 단속을 즉각 중단” 과 “노점상 생활대책 보장”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시청으로 향하였다. 물론 전투경찰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이날 투쟁으로 17명의 노점상이 심한 부상을 당하였다. 저항은 6월16일까지 계속되었다. 마침내 전두환 정권은 두 손을 들게 된다. 기존의 강경 노점단속에서 방침을 완화하고 보관소 폐쇄 계획을 보류하게 된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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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투쟁을 계기로 노점상의 문제가 사회 여론화되면서 하나의 세력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노점상 문제를 사회전면에 부각시키며 정부로부터 최초로 노점 단속 유보라는 부분적 승리를 쟁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점상들에게 단결하여 투쟁하면 승리한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무엇보다도 백만 노점상의 구심 “전국노점상연합”은 비약적인 조직확대를 이루게 된다. 6.13투쟁은 노점상의 6월 대항쟁이었던 것이다. 나아가 노점상들만이 아닌 민중운동진영과의 연대의 힘을 축적하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침묵으로 일관했던 노점상들이 알을 깨고 우리사회의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주요한 동력으로 부화된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열사들의 희생과 투쟁을 이끌어 왔으며 과정 속에서 어려움 역시 적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전체 회원들의 총의를 모아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해 냈다. 이제 17년의 역사를 갈무리하고 새롭게 전진을 해야 할 때다. 이번 2004년 6.13대회는 우리 백만노점상들에게 축제의 장이자 이를 넘어 새로운 희망의 길잡이가 되어야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