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무섭다
16일 아침. 여느 때처럼 출근한 나는 또 한 명의 동료가 열차에 치여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 나에게 든 생각이란? “이 죽음이 단체교섭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미쳤다. 이제 내가 완전히 미쳐버린 것이다.
‘단체교섭’ 이라구? 인간답게 살아보자구 외치고 또 외치고, 온몸으로
저항하고 또 저항해도 변함없이 우리를 재물로 삼는 이 현실 앞에 돌아서는
나를 본다.
새벽 6시,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경부선 수원부근 선로에서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작업을 하던 고 권진원님은 달리는 무궁화호 열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즉사했단다. 살이 튀고 피가 엉키고, 들어누운 바닥은 얼마나
차가웠을까? 칠순 노모와 부인, 5남매에게 사랑한다는 외마디 비명조차
질러보지 못하고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쉰 둘의 나이에 30년 철도
생활, 청춘을 철도에 바치고, 선로를 떠받치는 침목처럼 마지막도 그렇게 간
것이다. 사람이 없어 6일째 혼자 철야작업 중이었단다.
×팔, 동료를 친 기관사는 또 어떻게 하나? 정신없이 술이라도 퍼먹고 엉엉
울음을 터트릴테지. 그리고 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오늘은 무사히’를
간절히 되내이며 가감간을 잡겠지.
올해만 벌써 8명째다. 하루하루 죽음의 행렬이 길어질수록 감각도 무뎌져 아무
생각없이 근조리본을 찾는다.
아니 어찌됐던 줄어든 거 아닌가? 2001년엔 무려 31명이 죽어나갔고, 사람이
없어 사람이 죽어가는 이 철도 현장을 바꿔야 한다고 눈물로 호소하며
파업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2004년이면 실시한다던 약속도 인원충원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여전히 동료들은 열차에 치여 죽어, 과로로 쓰러져
죽고, 죽음의 대기표를 들고 오늘도 철도 현장으로 출근한다.
철도 10년. 지난 여름 난 2명의 친구를 차가운 철길에 묻었다. 그리고
상가집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
한 사무소에서 동고동락하던(24시간 철야맞교대를 하다보니 이틀에 한번은
같은 방에서 잔다) 후배는 안전장치도 없는 전동차 위에서 일하다 떨어져
10여일을 사경을 헤매다 결국 감긴 눈을 뜨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그이의
마지막 가는 길은 내가 지켜봤다. 실신한 노모를 부여안고 울부짖던 그이의
아내와 철 모르고 병원을 뛰어다니던 다섯살배기 딸애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닷새동안 ‘철도청장의 사과’를 요구하는 그이의 아내와 함께 뜬 눈으로
빈소를 지켰다. 그날 내리던 7월의 장마비는 아직도 나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또 얼마 후 열차 사고 뒷수습을 하던 선배가 열차에 치여 숨졌다는 비보를
들었다. “이렇게 사람이 죽어가는데, 당신들은 당신들은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냐”고 울부짖던 형수의 목소리가 나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리고 아직도 철도노동자인 나는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통과의례처럼 가슴에
까만 리본을 단다. 이제 슬퍼할 힘도, 분노할 힘도 잃어버렸다. ‘배부른
노동자’라는 멍에를 쓰고 아직도 내 순번이 되지 않은 것을 위안삼는다.
부정과 불의 앞에서도 ‘참는 것이 미덕’이란 걸 먼저 배운 탓이리라.
동료의 영결식이 있는 오늘, 거기도 가지 못하는 내가 정말 싫다.
故 권진원님! 이 놈의 미친 땅을 떠나서는 행복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