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삶-형태에 관한 분석서, 『다중』출간!!

안녕하세요. 다중의 활력과 지성 그리고 희망을 담아내는 [도서출판 갈무리]입니다. 『다중』 출간 안내와 관련 정보를 담았습니다. 더 상세한 정보가 필요하시면 02)325-1485,4207[편집부]로 연락주세요. 감사합니다.

<다중>
-현대의 삶 형태에 관한 분석을 위하여

포스트포드주의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삶­형태,
대안­형태에 관한 분석 빠올로 비르노의 <다중>

□ 도서명 : 『다중』
□ 지은이 : 빠올로 비르노
□ 옮긴이 : 김상운 옮김
□ 판형: 변형신국|제본: 무선|쪽수: 296 쪽
□ 정가 : 12,000원
□ 발행일 : 2004년 11월 1일
□ ISBN : 89-86114-71-2 043000

<표지 그림은 캘리포니아의 베니스 해변에서 열린 록 페스티벌이다. 빠올로 비르노의 다중 개념의 한 장면을잘 표현하고 있다.>  

빠올로 비르노의 <다중> 짧은소개

편의주의, 냉소주의, 두려움, 엑소더스, 호기심, 잡담, 기적, 탁월한 기예 등 일상의 단어들로 채워져 있는 이 책은 ‘다중’ 개념을 축으로 한 세미나의 기록물이다. 언어철학, 정치경제학, 윤리학에서 나온 개념들을 결합시키면서 빠올로 비르노는 현대의 공적 영역을 성찰할 때 ‘민중’ 개념이 아니라 ‘다중’ 개념이 가장 적실하다고 주장한다. 다중을 혐오한 홉스의 말을 빌리면,‘국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때, 시민은 민중에 맞서는 다중이 된다.’ 하지만 스피노자 등과 더불어 정의되는 다중은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이중의 성질을 띤 개념이다. 즉 다중은 자신 내부에 상실과 구원, 묵인과 갈등, 예속과 자유를 모두 담고 있다. 민중 개념이 다수에서 출발해 주권국가 등과 같은 일자에 이르는 반면, 다중 개념은 일자에서 출발해 다수에 이르지만, 이 때의 일자는 공동체나 주권이 아니라 소통 및 언어라는 공통의 장소이다.
그러므로 언어와 소통은?이방인의 경험으로부터,?’편치 않음’으로부터 파생된 불안을 다중 내부에서 누그러뜨리는데 도움을 주는 ‘공통들’이다. 이 때문에 다중은?권력을 장악하거나 새로운 국가를 구축하는 정치가 아니라 오히려 다원적 경험들, 비-대의제적 민주주의의 형태들, 비-국가적 정치로 아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둔다. 이러한 이중의 성질을 띠고 있기에 다중은 전쟁터인 동시에?근대정치이론이 근본적인 위기에 처한 오늘날, 새로운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한 것이다.  

자율주의적 입장에서 본 오늘날의 삶-형태에 관한 분석서,
빠올로 비르노의 <다중>

1) ‘다중’ 또는 ‘멀티튜드’가 인문사회과학계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9월 10일 서강대학교에서는 ‘맑스코뮤날레의 쟁점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주제는 <계급, 그리고 시민, 민중, 다중>이었다. 여기에서 일반인들이 전에는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단어 하나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다중’이라고? ‘다중’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민중’과 ‘시민’ 등 기존의 개념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이기에 이에 관해 ‘논쟁’을 한다는 말일까? 그리고 어떠한 경로로 ‘다중’이 사회과학계 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시점을 1999년의 시애틀 시위와 2001년의 시위로 옮겨보자. 혹자는 이를 아나키즘의 새로운 부활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다중>(갈무리, 2002)이라는 책에서 이탈리아 철학자 빠올로 비르노는 이를 새로운 정치 주체의 출현과 연결시킨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포스트-포드주의로 변화하는 것에 발맞추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기존의 민족국가나 국민국가로 양도하는 것에 저항하는 새로운 주체, 즉 ‘다중’이 출현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2) ‘민중’이 아닌 ‘다중’
사실 한국 사회에 ‘다중’ 또는 ‘멀티튜드’라는 이름의 도착은 이탈리아의 아우또노미아 이론가이자 인문사회과학 저서로는 보기 드물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제국>의 저자인 안또니오 네그리가 이 땅에 상륙하면서 존재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같은 아우또노미아 이론가인 이탈리아의 철학자 빠올로 비르노에 따르면 ‘다중’은, 비단 17세기의 정치철학의 거대한 대척점인 홉스와 스피노자의 대결지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정치사상에서 항상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물론 숫자의 많고 적음과 관련되어 있는 부정적인 모습으로서. 예를 들어 <성경>의 <마가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들은 다수이다.”(5장 9절) 이때 다수는 ‘레기온’인데, 이것은 문어(文語)로 ‘다중’(multitude)을 뜻한다. 하지만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다중’은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양식이다.

빠올로 비르노가 <다중>이라는 아주 짧고도 압축적인 책을 통해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새로운 존재양식이다. 저자는 우선 근대정치에서 ‘민중’ 개념만이 우리에게 전달되었지만, 사실 ‘민중’ 개념은 특히 17세기에 ‘다중’이라는 개념과 일대격전을 펼친 후에 살아남았다고 밝힌다. ‘저자는 민중’ 개념의 부모가 홉스라면 ‘다중’ 개념의 부모는 스피노자라고 하면서, ‘다중’ 개념이 패배한 까닭은 ‘민중’이 국가와 불가분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국가의 형성에 있어서 ‘민중’이 일정한 자기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국가가 있다면 민중이 있는” 것이다. ‘민중’이 ‘일자’나 ‘하나의 의지’와 긴밀한 연결 관계를 맺었다면, ‘다중’은 ‘다수’의 위협으로 국한되었다.

그러나 국민국가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고 지구화(세계화)가 넘쳐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 생산양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국민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민중’의 생명력은 소진되었으며, 그리하여 전에는 무참히 패배해 온갖 비난과 저주 세례를 받았던 ‘다중’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고 저자는 밝힌다. 말하자면 포드주의적 생산양식 및 일관생산라인이 종말을 맞았고, 지성이나 지각, 언어적 소통이 생산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의 주요한 자원이 되었다는 것이 이러한 이행에 결정적인 요점인 것이다. 가령 ‘지금은 근무중. 조용히 하시오’가 포드주의적 생산양식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근무중이므로 얘기를 하세요’는 새로운 생산양식을 대표하는 표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건 그저 개연성 있는 일화일 뿐이지만, 오늘날의 노동이 얼마나 소통을 자신의 생산동력으로 포섭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결국 미적 취향, 윤리적 결정, 정서, 감정 등이 노동의 세계에서 극히 중요한 가치를 발휘하고 있으며, 이는 결국 ‘생산자’와 ‘시민’, ‘공’과 ‘사’를 구별했던 경계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구별불가능 속에서 다중이 자신의 존재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3) ‘다중’의 존재양식
저자는 ‘민중’ 범주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다중’의 존재양식, 즉 언어놀이, 삶의 형태, 물질적 생산의 성격 등 다양한 범위에 걸친 범주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다중’이라는 대륙을 탐험하기 위해서, 인류학, 언어철학, 윤리적 성찰 및 정치경제학을 불러들인다. 이는 ‘다중’이라는 용어가 여러 개의 술어를 몸에 걸치고 있는 문법적 주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술어들을 해명하기 위해 개체화 원리(단독자를 단독성으로 만들고 개체를 개체성으로 만드는 것에 관해 주목하는 오래된 철학적 물음), 푸코의 ‘삶-정치’ 개념, 편의주의(기회주의)와 냉소주의라는 오늘날 ‘다수’의 삶 형태를 규정하는 감정적 기분을 끌어들여 분석을 전개하고,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파스칼이 분석했고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철학적인 주제의 반열로까지 격상된 두 개의 현상들인 잡담과 호기심에 입각해 오늘날의 존재양식을 규명한다.

4) ‘다중’은 노동계급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다중이 민중과 대립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노동계급과 대립된 것은 아니다. ‘다중’이 노동계급을 대체했다거나 노동계급이 종말을 고했고 ‘다중’이 출현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얘기일 뿐이다. “맑스뿐만 아니라 모든 진지한 사람의 의견에서도 노동계급은 어떤 습관, 어떤 용법 및 관습 등등과 일치하지 않는다. 노동계급은 이론적 개념이지 기념사진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적 잉여가치와 절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현대의 노동계급은…민중의 특질이 아니라 다중의 특질을 지니고 있다. 역으로 이러한 다중은 더 이상 국가성(statualit)에 대한 ‘민중적’ 소명을 주장하지 않는다. ‘다중’ 개념은 노동계급 개념을 전복하지 않는다. 이 개념은 정의상 ‘민중’ 개념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사실 ‘다중’이라고 해서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이 민중의 존재양식이 아니라 다중의 존재양식을 주장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엄청나게 많은 변화―멘탈리티, 조직의 형태와 갈등의 형태―가 있게 된다. 아주 복잡해진다. 오늘날에는 다중이 있고, 노동계급은 더 이상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지만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단순해지고자 한다면, 그저 적포도주 한 병을 비우는 것으로 충분하다.”

5) 양가적 존재양식으로서의 ‘다중’
하지만 ‘다중’에 관해 말할 때 무엇보다 먼저 피해야 할 것은 ‘다중’에 관한 모든 ‘장밋빛’ 환상이다. “다중은 존재양식이다.…하지만 모든 존재양식과 마찬가지로, 다중은 양가적이다. 다시 말해서 다중은 자신 내부에 상실과 구원, 묵인과 갈등, 예속과 자유를 모두 포함한다. 하지만 중요한 요점은 이러한 양자택일의 가능성들이 민중/일반의지/국가라는 성좌 안에서 나타났던 것과는 상이한, 특수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46쪽) 다시 말해서 다중이 ‘양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중이 서로 상반되는 방향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하는 특징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것은 노예상태로 가는 방향일 수도 있고 해방이라는 방향으로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편의주의(기회주의), 냉소주의의 편으로, 즉 타인보다 더 우월해지기 위해서 모든 기회를 이용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상태로부터의 탈출과 엑소더스로 표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때의 엑소더스는 영토 위에서 일어나는 탈출이 아니라 우리가 놓여 있는 장소로부터의 탈출이다. 국가의 속박으로부터 탈출하거나 임금노동으로부터 탈출하는 것, 소비주의나 스펙타클의 사회로부터 탈출하는 것 등… 아무리 시위를 하고 저항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경우가 있고, 이럴 때에는 도망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사유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따리의 사상과 접속되는 것이다.  

저자, 옮긴이 소개

저자 : 빠올로 비르노 (Paolo Virno, 1952~ )
빠올로 비르노는 1952년 이탈리아의 나뽈리에서 태어났으며, 1970년대에 이탈리아의 다양한 혁명 운동에 참여했다. 로마, 밀라노, 또리노의 공장노동자들과 함께 정치활동을 했다. 이후 (안또니오 네그리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1979년 소위 ‘4?7 재판’에 연루되어 반체제단체 구성 혐의로 투옥되었다. 정식 재판을 받기 전에 수감되는 구금생활인 “예방구금” 상태에서 3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에야 무죄로 석방되었다. 비환원주의적 유물론, 즉 자연과 역사, 언어활동과 제반생산관계를 결합시킬 수 있는 유물론으로 이르는 길을 찾고 있으며, 1997년부터 이탈리아의 깔라브리아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 윤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습관과 유물론>(1986), <세계성―감각적 경험과 공적 영역 사이에서 ‘세계’관념>(1994), <말 중의 말―언어의 힘과 한계>(1995), <기적, 탁월한 기예, 그리고 ‘기시감’―세계 관념에 관한 세 개의 에세이>(1996), <현재의 기억―역사적 시간에 관한 시론>(1999), <엑소더스의 실행>(2002) 등이 있고 마이클 하트와 공동편역한 <이탈리아의 급진 사상>(1996) 등이 있다. 이외 다수의 논문이 있으며, 잡지 <<다중>>(Multitudes)과 지속적으로 공동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paolo.virno@micanet.net)

옮긴이 : 김상운 (Kim Sang Woon, 1969~ )
김상운은 경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맑스, 푸코, 들뢰즈-가따리, 네그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지금은 일본에 머물면서 이탈리아의 미학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인 지오르지오 아감벤의 글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벤야민, 아렌트, 데리다, 지젝 등을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고찰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양창렬과 함께 공역한 <들뢰즈 사상의 진화>(갈무리, 2004)가 있으며, 웹저널 <자율평론>(http://jayul.net) 등에 번역글을 기고하고 있고, 학술모임 ‘자유정신’에 참가하고 있다. (sanggels@freechal.com)  

『다중』 저자 서문

1. 민중 대 다중:홉스와 스피노자
나는 ‘민중’이라는 좀더 친숙한 개념과 대립된 개념인 ‘다중’ 개념이 현대의 공적 영역(public sphere)에 관한 모든 성찰에 결정적인 도구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민중’과 ‘다중’ 사이의 양자택일이 17세기의 논쟁들, 즉 실천적인 측면들(중앙집권적 근대 국가의 수립, 종교 전쟁 등)과 이론적-철학적 측면들의 핵심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유념해야만 한다. 서로 대립했던 이 두 개념은 격렬한 충돌의 불꽃 속에서 제련되어 근대성에 관한 정치적-사회적 범주들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국 승리를 거둔 것은 바로 ‘민중’ 개념이었다. ‘다중’은 패배한 용어였으며, 그리하여 궁지로 내몰리게 된 개념이었다. 갓 구성된 거대한 국가들의 사회적 삶과 공적 정신의 형태를 그릴 때, 그 누구도 더 이상 ‘다중’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에 관해 말했다. 하지만 긴 주기가 그 끝에 도달하고 있는 오늘날 해묵은 논쟁이 재차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근대성의 정치이론이 근본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날 이처럼 한번 각하된 개념이 비범한 활력[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그리하여 극적인 복수를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물어야만 한다.
홉스와 스피노자는 이러한 두 개의 양극, 즉 민중과 다중의 아버지로 추정된다. 스피노자에게 물티투도(multitudo)는 공적인 무대에서, 집단적 행동에서, 공동체의 사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하나(un Un)로 수렴되지 않은 채, 운동의 구심적인 형태 내부에서 소멸하지 않은 채 그 자체로 존속되는 다원성[복수성, plurality]을 가리킨다. 다중이란 다수(Nombre)로서의 다수의 사회적?정치적 실존 형태이다. 그것은 일시적(episodique)이거나 중간적인(interstitielle) 형태가 아니라 영구적인 형태이다. 스피노자에게 물티투도는 시민 자유의 주춧돌이다.
홉스는 다중을 극도로 혐오한다.―나는 여기에서 열정적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학문적이지는 않는 용어를 충분히 숙고한 후에 사용하고 있다. 홉스는 다중에 대해 매우 분노한다. 그는 ‘지고의 제국’(empire suprme), 소위 정치적 의사결정의 독점―바로 이것이 국가이다―에 대한 가장 커다란 위험을 다수로서의 다수의 사회적?정치적 실존에서, 하나의 종합적 통일로 수렴되지 않는 다원성에서 발견한다. 어떤 개념―이 경우에는 다중―의 효력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식은 그 개념과 끈질기게 싸우는 사람의 눈으로 그것을 검토하는 것이다. 어떤 개념의 모든 의미 및 뉘앙스를 철저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사실 그 개념을 이론적 내지 실천적 지평으로부터 말살해 버리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중을 극도로 혐오했던 홉스가 이 개념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를 설명하기 전에, 여기에서 추구하고 있는 목표를 간략하더라도 명확히 설정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는 다중이라는 범주(이 범주의 불구대천의 적인 홉스가 다루었던 방식으로서의 다중이라는 범주)가 현대의 많은 사회적 관습행위(comportements)들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근대성의 여명기에 폐기되었던 대극[다중]이 ‘민중’의 세기들과 국가(민족국가, 중앙집권국가 등)의 세기들이 지나가 버린 오늘날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다중은 사회적, 정치적, 철학적 이론의 최후의 절규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만일 다수(Nombre)의 존재방식에서 기원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주목할 만한 현상들의 범위 전체―오늘날의 세계에서 언어 놀이, 삶의 형태, 윤리적 성향, 생산의 현저한 특성―는 결국 거의 대부분 이해될 수 없거나 아예 이해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존재양식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양한 종류의 개념적 협주곡―인류학, 언어철학, 정치경제학 비판, 윤리학 등등―에 호소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관점의 각도를 빈번하게 바꾸어 가면서 다중이라는 대륙의 언저리를 항해해야만 한다. 이미 말했듯이 통찰력 있는 상대로서 역할하면서 홉스가 ‘다수’ (Nombre)의 존재양식을 개괄하는 방식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홉스에게 다중과 민중 간의 정치적 대립은 아주 결정적이다. 근대의 공적 영역은 전자나 후자나 둘 중 어느 한 쪽을 자신의 중심으로 가질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양자택일 속에서, 언제나 위협적인 내전[시민의 전쟁]이 자신의 논리적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홉스의 말을 빌리면, 민중 개념은 국가의 실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나아가 그것은 국가의 반향이자 반영이다. 말하자면 국가가 있다면 민중이 있을 것이고 국가가 부재하면 민중도 없을 것이다. 다중에 대한 공포가 아주 장황하고도 광범위하게 드러난 책인 ?시민론?(De Cive)에서 우리는 다음을 읽는다. “민중은 하나인 어떤 것이다. 즉 민중은 하나의 단일한 의지를 가지고 있고, 또한 하나의 단일한 의지가 귀속되는 것이다.”
홉스에게 다중은 ‘정치체’(corps politique)가 제도화되기 전의 상태인 ‘자연상태’에 본래적으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전에 선행하여 있던 것인 다중은 마치 ‘억압되었던 것’(refoul)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되돌아오는 것처럼, 때때로 국가의 주권이 뒤흔들리는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내세우면서, 재차 표면 위로 떠오를 수 있다. 국가가 있기 전에 다수가 있었다. 국가의 성립 이후에는 하나의 단일한 의지를 부여받은 하나의-민중(le peuple-Un)이 있다. 홉스에 따르면 다중은 정치적 통일[단일성]을 기피하고, 복종을 거부하며, 지속가능한 협정을 체결하지 않는다. 또 다중은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주권자에게 결코 양도하지 않기 때문에 법적 인격의 지위(status)를 획득하지도 못한다. 말하자면 다중은 (다원적 특성이라는) 자신의 존재양식과 행동양식에 의해 이러한 ‘양도’를 금지한다. 위대한 저술가였던 홉스는 다중이 얼마나 반-국가인가를,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얼마나 반-민중인가를 존경스러울 정도로 세련되게 강조했다. “국가에 반대하여 시민을 선동하는 민중은, 다시 말해서 민중에 반대하는 다중이다.” 바로 여기에서 이 두 개념 간의 대립은 전체로 확산된다. 말하자면, 민중이 있다면 다중은 없다. 또한 다중이 있다면 민중은 없다. 홉스와 17세기의 국가주권 변호론자들에게 다중은 순전히 부정적인 한계-개념(concept-limite)이었다. 다시 말해서, 다중은 국가주의(tatisme)에 대해 제시된 위험들과 일치했다. 즉 그것은 때때로 ‘거대 기계’를 고장나게 할 수 있는 [기계의] 잔해들이었다. 부정적 개념인 다중. 다중이 국가에 의한 정치적 의사결정의 독점에 대해 잠재적으로(virtuellement) 모순되는 한에 있어서, 다중은 민중이 될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다중은 시민 사회에 ‘자연 상태’가 역류한 것이다.

2. 내쫓긴 다원성:‘사적’과 ‘개별적’
다중은 중앙집권적 국가의 창조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근대적 주권 개념이 완전히 확립된 후에, 다중은 어떤 은폐되고 허약한 형태를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는가? 다중의 메아리는 어디에서 들려오는가? 질문을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하면서, 다수로서의 다수가 자유주의 사상과 민주-사회주의적 사상에서 (이론의 여지 없이 민중의 통일을 고유한 준거점으로 가지고 있던 정치 전통들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어 왔는가를 규명하도록 노력해 보자.
자유주의 사상에서, ‘다수’에 의해 야기된 불안감은 공적-사적이라는 용어 쌍에 의존함으로써 완화된다. 민중의 정반대 극인 다중은 소위 사적이라고 불리는, 약간은 환상적이고 굴욕적인 모습을 띤다. 첨언하면 심지어 공적-사적이라는 쌍 자체도 수천 번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논쟁 과정에서 피와 눈물을 통해서 주조된 이후에야 명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쌍은 복합적 결과물에 의해서 유지된다. 공적 경험과 사적 경험에 관해 말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정상적인 것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이러한 갈라짐이 항상 자명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자명함의 결여는 흥미로운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어쩌면 새로운 17세기를 살고 있거나, 또는 낡은 범주들이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범주들을 우리가 주조해야만 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 엉뚱하고 유별나게 보이는 많은 개념들―예를 들어, 비-대의제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아마도 하나의 새로운 종류의 공통감각[상식]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리하여 지금은 이러한 것들 자체가 ‘명백한 것’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사적’은 개인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또한 이러저러한 개인의 내적 삶과 관련되어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사적이라는 것은 또한 박탈된을 의미한다. 즉 목소리가 박탈된, 공적인 현존이 박탈된을 의미한다. 자유주의 사상에서 다중은 사적인 차원으로서 생존한다. 다수는 실어증에 걸리며, 공통적 사태의 영역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민주-사회주의적 사상에서, 우리는 원형적(archaique) 다중의 메아리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집단적-개별적이라는 용어 쌍에서일 것이다. 혹은 더 좋게 말하면 이러한 용어들 중 두 번째에서, 즉 개별적 차원에서일 것이다. 민중은 집단적이다. 반면 다중은 무능하다고 추정된(impuissance prsume) 단독적 개인들에 의해서, 게다가 이런 개인들 각각의 자유분망한 소요(agitation dergle)에 의해서 어렴풋이 드러난다. 개인이란 이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완수된 다양한 나눗셈과 곱셈으로부터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잔여물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단독적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에 입각해서 보면, 단독자(le singulier)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듯이 보인다. 다중이 민주적-사회주의적 전통 내부에서 말로 표현될 수 없듯이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앞으로 얘기하면서 계속해서 말하게 될 어떤 신념을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오늘날의 삶의 형태에서 우리가 공적-사적이라는 용어 쌍이나 집단적-개별적이라는 용어 쌍이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며, 그것들은 더 이상 어떤 것에도 기대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지각하고 있다고 믿는다. 생산이 계량경제학적(econometric) 분석에 내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이 세계의 광범위한 토대―에토스, 문화, 언어적 상호작용과 같은 것으로 채워져 있는―를 가지고 있는 경험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며, 현대의 생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엄격하게 나누어졌던 것이 이제 서로 뒤섞이며, 서로 포개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집단적 경험이 끝나고 개별적 경험이 시작된 곳이 어디인지를 말하기 어렵게 된다. 공적인 경험을 소위 사적인 경험과 분리하는 것도 어렵게 된다. [공과 사, 집단-개인을 나누던] 경계선은 이처럼 희미해지고 있으며, 루소, 헤겔 그리고 이후 맑스 자신(비록 논쟁의 한 관점에 불과하긴 했지만)에게 그리도 중요했던 시민과 생산자라는 두 범주들은 자취를 감추거나 거의 신뢰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현대의 다중은 ‘시민들’로 구성된 것도, ‘생산자들’로 구성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개인과 집단’ 사이의 중간 지대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다중의 경우 ‘공’과 ‘사’의 구별은 결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명백하다고 주장되어 온 이러한 용어의 짝이 와해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의 통일성으로 수렴되는 민중에 관해서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포스트모던하다는 딱지가 붙은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후렴구(“다양체는 좋으며, 통일은 경계해야 할 재앙이다”)를 부르고 싶지는 않으나, 다중이 일자(l’Un)와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재정의한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심지어 다수가 통일의 형태를, 하나(un Un)의 형태를 필요로 할 때에도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핵심이 있다. 즉 이러한 통일은 더 이상 국가가 아니라 언어, 지성이며, 인간이라는 유(類)의 공통적인 능력들이다. 일자는 더 이상 약속이 아니며, 그것은 전제이다. 통일은 민중의 경우에서처럼 더 이상 사물이 수렴되는 어떤 것(국가, 주권)이 아니라 오히려 배경이나 필수적인 전제조건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다수는 보편적인 것의 개체화, 유적인(gnrique) 것의 개체화, 공유된 경험의 개체화로서 사유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칭적인 방식으로, 하나(un Un)를 결론처럼 확실한 어떤 것이 아니라, 분화(diffrencia- tion)를 정당화하는 토대로서, 또는 다수인 한에서의 다수의 정치-사회적 실존을 허용하는 토대로서 사유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해야만 한다. 나는 다중이라는 범주에 관한 작금의 성찰이 열광적인 단순화나 피상적인 축약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일 뿐이다. 대신, 그러한 성찰은 약간의 조악한 문제들과 대결해야만 한다. 특히 하나/여럿(Un/Multiple)의 관계에 관한 논리적인 문제. (이것은 제거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재정식화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3. 다수에 대한 세 가지 접근방법
세 개의 주제군을 발전시킴으로써 현대적 다중의 구체적인 차원을 정확하게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아주 홉스적이다. 말하자면 두려움과 안전 추구의 변증법. (그것이 자유주의적 분절이든 민주-사회주의적 분절이든 간에 하여간 17세기의 분절에 있어서) ‘민중’ 개념은 분명 위험을 제거하고 방어책을 획득하기 위해 발전된 몇 가지 전략을 둘러싸고 형성되었다. 나는 경험적?개념적 측면 모두에서, 두려움의 형식과 이에 대응하는 방어의 형식이―이것은 ‘민중’ 개념과 연결되어 있었다―실패했다고 지금은 주장할 것이다. 대신 만연한 것은 상당히 다른 공포-방어(crainte-protection)의 변증법이다. 이것은 오늘날 다중의 여러 가지 특징적 성질들을 정의한다. 두려움-안전(peur-scurit), 이것은 다중의 모습이 ‘장밋빛’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모습에 잠복해 있는 특정한 독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철학적?사회학적으로 유의미한 눈금자나 시험관(rvlateur)이다. 다중은 존재양식이며, 그것도 오늘날 만연해 있는 존재양식이다. 하지만 모든 존재양식과 마찬가지로, 다중은 양가적이다. 다시 말해서 다중은 자신 내부에 상실과 구원, 묵인과 갈등, 예속과 자유 등을 모두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요점은 이러한 양자택일의 가능성들이 민중/일반의지/국가라는 성좌 안에서 나타났던 것과는 상이한, 특수한 생김새(physionomie)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다음 세미나에서 다룰 두 번째 주제는 다중 개념이 인간의 경험을 노동, 정치, 사유로 나눈 고대의 삼분법의 위기와 맺은 관계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한, 무엇보다 20세기에 한나 아렌트가 또다시 제기했고, 아주 최근까지 상식으로 완벽하게 통합된 세분화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세분화는 오늘날에는 상식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그리하여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는 세분화이다.
세 번째 주제군은 다중의 주체성에 관해 어떤 것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선별적 범주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러한 범주들 중에서 세 가지를 검토할 것이다. 개체화 원리, 잡담과 호기심이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 범주[개체화 원리]는 극히 중요한 물음임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경시되었던 형이상학적 물음이다. 즉 단독성(singularit)을 단독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한편 나머지 두 개의 범주들은 일상생활과 관련되어 있다. 잡담과 호기심이라는 범주에 철학적 개념의 위엄을 부여한 사람은 바로 하이데거였다. 나의 논지는 ?존재와 시간?의 몇몇 구절을 이용할 것이지만, 이 범주들에 관해서 내가 말하는 방식은 실질적으로는 비-하이데거적이거나 현실적으로는 반-하이데거적일 것이다.

역자 후기: 다중에 관한 탐구

이 책은 백성도, 민중도, 인민도, 시민도 아닌 ‘다중’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주체성에 관한 탐구이다. 한국 사회에 ‘다중’ 또는 ‘멀티튜드’라는 이름의 도착은 이탈리아의 아우또노미아 이론가 중 한 사람인 안또니오 네그리의 상륙과 궤를 같이 하며, 안또니오 네그리의 <야만적 별종>(윤수종 옮김, 푸른숲, 1997)을 통해 ‘스피노자’와 함께 알려졌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이면서 그 역시 아우또노미아의 중요한 이론가인 빠올로 비르노에 따르면 ‘다중’은, 비단 17세기의 정치철학의 거대한 대척점인 홉스와 스피노자의 대결지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정치사상에서 항상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네그리가 ?귀환에 관하여?(Du Retour)에서 밝히듯이 이것은 심지어 <성경>에도 나온다. <마가복음>의 ‘Their name is legion’(<마가복음> 5장 9절)이라는 구절은 흔히 ‘그들은 다수이다[무수하다]’로 번역된다. 보통 군대, 군단, 대군을 뜻하는 ‘레기온’(legion)은 문어(文語)로는 ‘다중’(multitude)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다중’은 ‘다수’라는 수 또는 양적인 개념과 관련된 부정적 개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논의의 지평으로 재차 복귀하고 있는 ‘다중’은 무엇보다도 우선 ‘새로운’ 존재양식이다. 그러므로 ‘다중’에 관해 말할 때 무엇보다 먼저 피해야 할 것은 ‘다중’에 관한 모든 ‘장밋빛’ 환상이다. “다중은 존재양식이다.…하지만 모든 존재양식과 마찬가지로, 다중은 양가적이다. 다시 말해서 다중은 자신 내부에 상실과 구원, 묵인과 갈등, 예속과 자유를 모두 포함한다. 하지만 중요한 요점은 이러한 양자택일의 가능성들이 민중/일반의지/국가라는 성좌 안에서 나타났던 것과는 상이한, 특수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개념을 둘러싸고 적합성을 논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논해야 할 것은 포스트-포드주의라는 현대자본주의의 생산양식 하에서 주체성의 존재양식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중 ‘개념’은 무엇보다 정치학의 계급적 맥락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중은 정치가 필연적으로 의회-체계가 아닌 행정 중심으로 체계로 구축되게 된 이른바 대의체제의 쇠퇴 또는 무력화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다중은 정치적 대의체제의 메커니즘을 방해하고 해체한다. 그것은 자신을 ‘행동하는 소수’의 총체로 표현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을 다수로 변형시키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부가 되기를 거부하는 역량(power)을 발전시킨다.”
다시 말해서 다중 개념은 고전사회학의 용어로는 측정할 수도, 재현할 수도 없는 사회-정치적 배치를 새롭게 등록한다. 그러므로 다중 개념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개념이지만, 그러나 정치적인 것을 재개념화함으로써 역으로 사회적인 것을 역량의 관점에서 재개념화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티투도(multitudo)와 포텐샤(potentia)를, 그 앞에 접두사를 무한하게 첨가할 수 있는 하나의 생산적 집합의 지표로 생각할 수 있을까?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이 개념을 병합해 버린 ‘사회적인 것’ 개념으로부터 따로 떼어내어 구축할 수 있을까? 또 ‘정치적인 것’에서 이해와 표현의 내적인 핵심이 발견되는 ‘사회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구축할 수 있을까? 즉 힘의 표현을 단순화하는 것(simpliciter)이 가능할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볼 때 다중 개념의 철학적 기반은 무엇보다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이다. 이를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두 갈래의 실타래를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 ‘민주적 실타래’이며 다른 하나는 ‘절대주의적 실타래’이다. 전자가 역량(potenza)과 권력(potere)을 구분한다고 하면, 후자는 홉스처럼 다중과 민중을 구분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그로티우스, 홉스에게는 민중의 주권, 즉 주권적 권리의 양도가 있다. 이들에게 주권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흡스에게 그렇듯이 주권은 양도되는 권력이어야만 한다. 이는 정치적 동의에 토대를 둔 전통, 다시 말해 롤스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전통이기도 하다.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적인 것이 개체[개인]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이 때문에 이들의 정치적인 것은 법과 동의, 기술지배체제로 국한된다.
반면 (홉스에 따르면) “다중은 정치적 통일을 기피하고, 복종을 거부하며, 지속가능한 협정을 체결하지 않는다. 또 다중은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주권자에게 결코 양도하지 않기 때문에 법적 인격의 지위(status)를 획득하지도 못한다.” 또한 “다중은 ‘자연적인’ 반-사실(ante-fact)을 구성하기보다는 자신을 역사적인 결과로서, 생산과정과 삶의 형태 내부에서 발생한 변형의 성숙한 도착점으로 제시한다. ‘다수’는 무대 위로 쏟아져 나오며, 이들은 거기에서 절대적인 주역으로 서 있으나 바로 거기에서 작업[노동] 사회의 위기가 펼쳐진다. 포스트-포드주의적인 사회 협력은 직업적인 자질과 정치적인 성향의 구별뿐 아니라 생산시간과 개인시간의 경계를 제거하면서 ‘공/사’와 ‘집단/개인’의 낡은 이분법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다. 마침내 ‘생산자’도 ‘시민’도 아닌 근대적인 거장(virtuosi)이 다중의 반열에 도달한다.”
다중은 ‘주권’ 및 ‘국가’를 한 몸으로 가지고 있는 ‘민중’과 다를 뿐만 아니라 ‘민중’이 전제하고 있는 다수와 소수의 변증법, 말하자면 다수는 동질적이고 일관된 체계의 담지자인 반면 소수는 이 다수의 안정적인 하위체계에 불과하다고 하는 그런 변증법과도 무관하다. 이런 의미에서 다중은 오히려 들뢰즈적인 의미에서 ‘소수자-되기’(becoming minoritarian)이다. 다중은 ‘민중’으로 동일화될 수 없는 여러 상이한 ‘행위하는 소수자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 다중은 다수가 되기를 갈망하지 않으며, 자신의 역량(potenza), 지성, 창조성을 ‘정부’로 변환시키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서 다중은 유일한 다수가 되기를 배제하며, 설령 편의주의와 냉소주의에 종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집단성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다중이 유일하게 속해 있는 곳은 바로 ‘여기 지금’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삶-정치’ 개념과 ‘노동-역량’ 개념의 관계에 관해 간단하게 살펴보자. 비르노에 따르면 “역량은 다시 말해서, 능력(facult), 재능(capacit), 가능태(dynamis)이다. 유적이고 미결정된 역량.” 따라서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교환의 대상인 모든 현실적 노동에 선행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량’이다. 그는 이러한 ‘노동-역량’이 현대 경제에서 일련의 기계적 능력, 소위 실질적 노동(travail effectif)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오히려 상이한 상황에 대한 무한한 적응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어떤 특수한 행위로 전환될 수 있느냐 여부에 따라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역량 그 자체로 가치평가되는 것이다. 비르노가 보기에 삶-정치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산적 역량이다. 그리하여 삶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역량을 관리하기 위해서 삶이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비르노가 노동으로부터 작업과 행위를 분리시키고, 따라서 노동을 인간의 다양한 활동양식의 하나로 상대화함으로써 노동에 기초한 근대적 정치사유를 혁신하고자 한 아렌트의 구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말하자면 아렌트의 지적과는 반대로 행위가 노동에 포섭되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아렌트는 노동-역량이 어떤 전문적인 능력도, 어떤 특수한 과제를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아니고 인간이라는 동물이 지닌 모든 상이한 능력들과 역량들의 총체가 되었음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르노는 지적한다.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독해 속에서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듯이, 이와 똑같은 구절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 있는 “유적인…역량”이라는 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비르노는 푸코의 삶-정치에 관해 논하고 있는 지오르지오 아감벤을 포함하여 네그리-하트를 비판한다. 이딸리아의 미학이론가이자 철학자인 지오르지오 아감벤은 그의 주저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서 푸코의 ‘삶-정치’ 개념을 받아들여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면서도 푸코와 거리를 둔다. 그는 자연적 삶과 정치적 삶, 즉 ‘조에’(Zo)와 ‘비오스’(bios)를 구별하면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이런 구별이 중요했으나 오늘날의 우리는 이를 모르고 있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근대의 결정적 사건은 바로 이런 ‘폴리스’의 영역에 ‘조에’가 도입된 것이라고 아감벤은 주장한다. 푸코 역시 이런 주장을 하면서도 권력에 대한 법?제도적 모델을 기각해야 한다고 본 반면, 비르노에 따르면 아감벤은 푸코의 삶-정치를 도입하여 이를 고대 로마법 이래 항구적으로 존속해 온 존재론적인 범주로 전환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비르노는 푸코식의 삶-정치를 노동-역량의 존재양식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역량이 근본적인 항이며 삶-정치는 이것의 효과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또 아감벤은 노동-역량을 삶-정치가 지닌 제 측면들 중의 한 가지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오히려 비르노는 이와는 정반대로 말한다. 그에 따르면 노동-역량이 역설적인 상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노동-역량이 책과 같은 유형의 상품처럼 실제로 상품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역량이 상품으로 변형되자마자 권력은 이러한 역량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러한 역량을 유지하고 있는 신체를 지배해야만 한다.
다른 한편, 비르노는 네그리와 하트가 삶-정치를 역사적으로 ‘결정된’ 의미로 사용한다고 비판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푸코에 의존하면서 삶-정치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실제로 푸코는 삶-정치에 관해서는 그다지 말한 바가 없으며 그저 자유주의의 탄생과 관련하여 몇 가지를 말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는 삶-정치에 관한 담론을 정초하는 데 있어서 충분한 토대가 아니며, 게다가 푸코를 그런 식으로 다루게 되면 오히려 삶-정치를 은폐하고 감추는 단어로 삶-정치가 변형되어 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것이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 있는 “미결정된 역량”이라는 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원래 이탈리아어로 출간되었고 이후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역되었다. 처음에는 영역본에 근거해 번역을 진행했으나 논리적 연결의 어색함, 문장구조의 애매함, 용어의 불명확함(가령 생산관계와 생산양식을 바꿔 써 버린 경우) 등이 두드러져 불역본을 가지고 처음부터 다시 번역에 들어갔다. 하지만 애초에 강의록인 탓인지 우리말로 한달음에 매끄럽게 읽어나가기 힘든 문장 구조를 가지고 있어 가급적 직역보다는 이해하기 쉽게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했다. 한편 인용문의 경우에는 이와는 정반대로 불역본이 지나치게 축약적이기도 하고 또 인용 쪽수에 오류를 보이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어서 오히려 영역본에 의존했다. 이에는 홉스나 아렌트의 경우 영어로 글을 썼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어쨌든 대체로 영역본과 불역본의 차이가 크다고 판단될 경우 본문에는 거의 대부분 불역본을 표기하고 옮긴이 주에 영역본의 번역을 수록했다. 중복되는 느낌은 있으나 의미전달의 명확성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니 독자의 양해를 널리 구한다.
한편 영역자 서문의 경우 비르노와 네그리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것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는 측면이 있지만, 아우또노미아 자체가 단일한 이념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의 미묘한 차이도 담지하고 있으며, 또 그런 차이를 스스로 증폭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 동학을 이해하는 데 일정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 수록했다.
옮긴이가 첨부한 네 개의 부록은 본문의 내용과 상당부분 겹치지만 각각 나름의 특성이 있기도 하고 또 본문의 내용에 비해 더 깊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여기에 실었다. 부록이 원래 독립적으로 발간된 것이라 본문을 읽기 전에 일종의 요약본이라고 생각하면서 읽는 것도 유의미할 것이다. <부록 1>과 <부록 2>는 주로 <제2강>과 관련되며, <부록 3>은 <제3강>과 관련된다. 한편 <제4강>은 이미 한국어로 발행되었기에 여기에 수록하지 않은 <이딸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 1>(이원영 편역, 갈무리, 1997)에 실린 비르노의 2개의 글인 <당신은 반혁명을 기억하는가?>, <“일반적 지성”에 관한 몇 가지 노우트> 등과 함께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번역어에 관해서 몇 마디를 추가하고 싶다. 비르노는 아렌트의 노동, 작업, 행위의 구분을 자기 식으로 비틀어서 이를 하이데거,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홉스를 끌어들여 접고 펼친다. 이 와중에 ‘virtuosity’나 ‘virtuosi’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전자는 보통 ‘예술적 탁월성’ 혹은 ‘탁월성’으로 옮겨지고 후자는 바로 그러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지만, 두 단어 모두 마키아벨리식의 의미에서 ‘virtu’와 밀접한 연결관계가 있다. 이는 비르노가 의존하는 한나 아렌트의 논의에서도 직접적으로 엿보인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의 논의에서도 그렇거니와 특히 비르노에게서 이 단어는 작업 활동 일반의 성격을 지칭하는 것, 특히 일반지성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논의되는 바, 이를 예술과의 함의를 지닌 ‘예술적 탁월성’으로 옮기는 것도, ‘virtu’라는 의미를 결코 떠올리게 할 수 없는 ‘탁월성’으로 옮기는 것도 사실상 모두 부적합해 보인다. 따라서 애매한 번역어가 될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탁월한 기예’로 옮기고 후자는 간단하게 ‘거장’으로 옮긴다.
한편, 프랑스어의 ‘partition’과 영어의 ‘score’는 모두 ‘악보’나 ‘음계’ 등을 총칭하여 부르는 말이다. 물론 이를 ‘악보’로 번역하게 되면 주로 ‘음악’에만 한정되는 용어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다른 적합한 번역어가 없기도 하거니와 음차를 하여 ‘스코어’로 표기할 경우 비르노의 논지를 우리말로 전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어 ‘악보’로 옮겼다.
그리고 <제1강>에서 언급되는 ‘두려움, 불안, 공포, 방어’나 <제3강>에서 주로 나오고 있는 ‘탈주, 도망, 엑소더스, 탈출, 탈퇴’ 등은 가급적 의미전달의 명확성을 위해 대부분 일관된 용어로 옮겼으며, 번역어 용례를 본문에 붙인 각주에 달아 놓았다. 다른 한편, 하이데거의 용어는 <존재와 시간>의 번역자인 이기상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으며, 필요한 경우 역주에 소광희의 용어법을 명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