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수도이전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 때 부터 미국이 기회있을 때 마다 직간접으로 종용해온 것이다.
미국의 요구대로 이승만은 서울을 대전으로 옮기기 위하여 구체적인 도시계획과 공사까지 하였었다. 그러나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는 것이 나라의 영구분단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승만은 차일피일 미루며 버티던 중 밀려나게 되었고, *미국이 조종한 군사반란에 의해 집권한 박정희 또한 미국의 종용에 의하여 수도이전을 계획했으나 *애국열사 김재규장군에 의해 처단됨으로서 중단되었다.
박정희에 이어 미국을 상전으로 모시게 된 전두환은 수도를 지금의 계룡시를 포함한 지역으로 옮기기로 확정하고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당시의 미묘한 분위기로 인하여 3군본부만을 이전한 채 보류되었다.
작금의 노무현은 어떠한가, 이 자는 대통령자리와 신변보장만 된다면 미국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던지 하는 자이다. * 애국심과 도덕심은 없고 능수능란하게 가면을 바꿔쓰며 살아가는 정치사기꾼에 불과하다. 사법시험합격 이후 미국의 관리대상 한국인 가운데 포함된 노무현의 이러한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에 미국은 애국심이 아주 희박한 또 하나의 교활한 여우 이회창과 한국의 대권을 놓고 겨루는 것을 *용인한 것이다.
미국은 왜 한국의 수도를 이전하려고 할까?
한반도의 영구분단 때문인가, 전쟁을 치르기 위한 대비때문인가?
미국의 한반도 기본정책은 원래 영구분단 이었지만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는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미국이 1945년 한국을 점령한 후 부터 계속된 한국에 대한 내정참여와 간섭은 군사반란을 통해 내세운 박정희때 부터는 그 도가 상상을 넘어서고 있다. 미국이 이승만에게 강요한 *거대 통합정보기관의 창설은 이승만의 강경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박정희는 미국의 뜻대로 통합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였고 이를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미국은 한국 에 대한 정보수집과 통제를 더욱 강화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정상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경제구조로서 북한의 김일성정권에 버금가는 악질권력과 윤리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장삿꾼이 야합해 온갖 특혜를 독점해가며 정상적인 기업인을 배제한체 만들어진 기형적 경제체재를 비롯하여 이루 다 열거할 수도 없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시행할 수 없는 일로서, 전국민에게 목장에서 기르는 짐승처럼 일련번호를 매기고 지문을 날인하게 하는 박정희 때 부터의 주민등록 제도와 노무현이 집권하자 마자, 호주제가 사실은 이미 폐지되어 호적기록상 명칭으로만 남아있을 뿐, 제도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아직도 옛날과 같은 호주제도가 존재하는 것처럼 떠들어 대며 이를 폐지하자는 구실을 내세워 실제로는 한국의 전통적 가족친인척의 기록부인 * 호적을 없애버리려는 것, 애국심과 직결되는 한국인의 애향심을 말살하는 도(道)의 폐지 안 등도 모두 미국의 종용과 간접적인 손길을 빌린 검은 공작에 의한 것이다.
— 해설 —
* 5.16 군사반란시 미국 CIA 부장이었던 자가 뒷날 일본의 동경에 와서 한국의 5.16은 자신이 재임중 최초로 성공시킨 쿠데타였다고 말하였다. (발언 당사자는 쿠데타를 revolution-혁명으로 표현함)
또한 4.19와 5.16 당시 미 CIA 한국 지부장이었으며 항가리 폭동을 위시하여 가는 곳마다 정부전복과 폭동을 일으켜 대(對)정부 전복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피어드 실버는 그의 회고록(제목-서브로자)에서 장면총리는 한국정치사에서 앞으로 50년 후에나 나왔어야 할 사람이라고 하였다.
*김재규열사가 중정부장으로 취임한 후, 과거 죽산 조봉암선생 등이 추구했던 혁신적인 정치경재체재로의 대전환을 하기위한 연구팀을 극비리에 가동시키고 있었다. 근본적인 국가변혁을 추진함에 있어서 인간망종인 박정희에게 까지 동조를 구하려 했던 것이 거사가 실패하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
* 과거 노무현은 그 형과 함께 국가기관의 시설에 침투하여 도둑질한 재물로 재산을 증식하였고 (대선전 중앙일보 등의 사실행적 보도) 가진 자의 편에 서서 피해를 당한 돈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악덕변호사였다.
* 일시적으로 잠깐 이용물이 될 경우를 제외하고 정상적인 한국인이 한국에서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라도 있는 자리에 설수 있는가?
30 년만에 비밀해제되어 1983년 밝혀진 미국무성 기밀문서에 의하면 1952년 한국에서 이범석.안호상일파가 정권을 잡게되면 주한미군(국무성 문서엔 유엔군으로 표기)으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미국의 방침이었다. 이범석 안호상은 일제치하에서 부터 반공을 해온 골수우익으로 가장 철저한 반공정신을 가진 사람들 이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이들이 정권을 잡게되면 제거하려 한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이범석 안호상등은 반공정신이 철저하고 미국에 협력하였지만 미국과 한국의 국익이 대립될 때는 미국편이 아니라 한국편에 설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1952년 무렵에는 한국인으로서의 기본이라도 갖춘 사람들이 정권을 잡기 직전 까지 갈 수 있었으나 지금의 상황은 어떠할까?
6.25당시 일본군의 한반도상륙 참전과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키려 한 미국의 정책에 *격렬히 저항한 이승만과 그동안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협력해 왔던 장면과 송요찬이 각각 내각제하의 총리와 군사정권의 내각수반으로 취임한 후 미국의 시책에 맹종하지 않고 부당한 요구에 반발했던 것에 곤혹스러웠던 미국은 이후 인간쓰레기나 다름없는 자들로 한국의 대권을 쥐게 하고 나아가 한국의 정치권 전체를 쓰레기들로 채워놓기 시작하였다.
간혹 정치판에 그렇듯하게 보이는 사람도 실상은, 미국이 각고의 노력끝에 날조해놓은 가짜보수 양당제를 비롯하여 근본적으로 일그러트려 못쓰게된지 오래인 정치현실을 호도하기 위해 일정한 한계내에서 잠정적으로 이용하는 경우이거나 겉과 속이 다른 위장물일 뿐이다.
미국이 한국을 공식적으로 접수했던 1945년을 전후하여 지난 60 여년 동안 한국의 학계와 언론계를 비롯하여 각계각층에 각양각색의 모습으로(표면상 반미,친북인사까지 포함하여) 곳곳에 깔아놓은 미국의 *간첩망과 정상적인 우호협력이 아닌 매국적 부역자가 우글거리는 속에 국가 지도자로서 최소한의 기본 자질이라도 갖춘 사람이 한국에서 정권을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한국의 정치권에서 지금까지 여야와 재야의 투사를 막론하고 전국민의 시야에 드러난 유력한 정치인은 거의 모두 미국을 추종하는 자이거나 적어도 미국을 추종하는 척이라도 하는 사람들(신익희,조봉암등의 경우)이 아니면 안되었다.
* 2차대전이 끝난 후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일본인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왕정(소위 천황제)을 폐지하려 하였으나 일왕을 그냥 두고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차선책으로 호적을 폐지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우리나라 호주제는 법률상 호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조항이 모두 삭제되어 남녀불문하고 미성년자라도 원하면 호주가 될수있게 되어 있다.
과거 호주에게 부여 되어있던 권리나 의무 같은 것은 없고 호적기록상의 편의를 위한 호칭일 뿐이다. 그래서 호주의 사망시 새호주를 기록할 때 과거처럼 호주상속이라 하지않고 호주명의 승계라고 하는 것이다. 현재 제도로서 굳이 문제점을 거론한다면 호주가 아니라 세대주와 세대원사이에 현격하게 여러가지로 차별을 하고 있는 세대주에 관한 것이다.
*6.25전란이 한창일 때 이승만대통령은 최전선을 순방하며 장병들을 모아놓고 이제 남쪽으로 일본군이 상륙하면 너희들은 북쪽으로 향했던 총구를 일제히 남쪽으로 돌려 올라오는 왜놈들을 모조리 쏘아 죽여라,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은 비록 적이라도 동족이지만 왜놈들은 우리의 철천지원수이다. 한놈도 살려보내지 말고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몇년 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우리를 일본에 예속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북쪽과 손을 잡겠다고 공언하였다. 이에 미국은 이승만의 진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각각 이승만과 면담하는 캐나다 수상과 영국외상에게 이승만의 뜻을 확인해 주도록 요청하였는데 이들이 이승만과 회담후 미국에 전달한 내용이 서로 상반된 것이었다.
* 간첩의 종류와 레벨은 실로 다양한데 김형욱도 박정희 전두환 김종필 *김대중 등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정보원(현지인 간첩)이었다. 박정희와 함께 김형욱은 4.19후 출범한 장면정부를 전복시킬 빌미를 만들기 위해 과격하고 무분별한 데모와 시위가 일어나 사회가 혼란스러워 보이도록 자금을 대주며 이들 과격한 데모를 뒤에서 사주하는 공작도 하였었다.중앙정보부장이 되었을 때는 어느정도 자립한 상태였으나 김형욱의 미국에 대한 충성도를 시험해 볼겸, 현직 대통령 박정희의 과거 행적에 대한 조사를 다시 해줄 것을 미국이 요구하자 중정요원인 김상근을 팀장으로 하여 극비리에 박정희의 과거 행적을 뒷조사하여 미국에 보고하였다. 이 일을 맡았던 김상근은 이러한 사실이 박정희 귀에 들어가 보복살해 당할 것에 두려워 하다가 적당한 기회를 틈타 미국으로 도주(망명)하였다.
* 원래 김대중은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망하고 한국에서 철수할때 심어놓은 일본의 잔류첩자였다. 그 후 한국이 누구의 손아귀에 있는지를 확실히 알게된 영악한 김대중은 미국의 정보망에 협력하며 각종 제보를 해오다 정식으로 관계를 맺자는 미국측의 제의를 받고 짐짓 주저 하는듯한 자세를 취했으나 얼마안가 관련서류에 서명하고 현지인(現地人) 간첩인 미국의 정보원이 된 자였다. 이후 미국이 한국에 정략적으로 조성해 놓은 박정희세력 대 반박정희세력의 대결구도에 한축으로서 활동한다.
김대중이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고 받은 몇개의 기업을 비롯한 막대한 재물은 그의 능력부족으로 말미암아 유지하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오늘날의 김대중이 있게한 결정적 토대가 되었다. 이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듯 김대중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인 1998년 과거 박정희도 감히 하지 못했던 일본대중문화 개방을 관계공무원과 식자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하였다. 사이비 가짜 민주화에 국민의 시선이 주춤해진 사이에 해치워버린 것이다. 또한 그는 추악한 집안내력으로 인한 어지러운 호적기록 때문에 골머리를 앓은 일이 있었는데 대통령이 되자 여성부를 신설하고 미국의 박정희대 반박정희세력의 대결구도에 투입됐던 앞잡이를 장관으로 앉히고 숨겨진 음모의 실상을 알리 없는 여성단체와 시민단체들을 앞세워 남녀간의 대립과 갈등을 확대하고 증폭시키는 등의 반사회적인 수단까지 동원하여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전국민의 가족기록부인 호적을 아예 없애버리는 공작을 집요하게 추진하였다.
*김대중의 집안내력에 대한 관련기사 –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1242&logId=244407
김대중의 처 이희호는 누구인가? 그녀는 일찍이 앞날에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를 물색하다가 서울문리대 학생회장으로서 전도가 양양해 보이던 계훈제를 만나 사실혼 관계에 들어갔으나 계훈제가 중증의 폐결핵에 걸려 건강이 원상회복될 수 없게되자 계훈제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김대중에게 접근하여 결혼한 여자였다. 그녀의 행적과 동향을 살펴볼때 한두 번의 지령만 받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장기잠복형 미국의 고정간첩일 가능성이 농후하나 아직 확인된 바는 없다.
김대중의 숨겨진 정체를 모르는 이종찬은 한때 박정희정권을 전복시킬 군사혁명을 모의하면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기로 하였었다. 모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이 김대중에게 귀뜀이라도 되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는데 성공할 확율이 극히 불분명한 거사에 대해서 비밀을 지켜줄 김대중이 아니었다. 박정희 반민정권을 축축할 군사혁명의 중심축이었던 군인신분의 중앙정보부 요원 이종찬은 곧 멀리 해외로(영국) 전출되고 비록 추진과정에 커다란 문제점이 있기는 하였으나 모처럼 조성되던 뜻깊은 거사계획은 훗날 에피소드의 소재로서나 남게되었다.
* 박정희의 악랄하고 교활한 행각은 헤아리기 조차 어려울 정도이다. 대구사범학교 시절 그의 은사는 학적부에 박정희가 진실성이 없다는 기록을 남겨 교사로서의 박정희에게 이미 사형선고를 내려 놓았거니와 문경에서 소학교 교사를 할때 박정희 방에는 제자인 어린 여자아이들이 빈번하게 출입하였는데 이중에 한명이 임신한 사실이 밝혀져 교장에게 질책을 당하고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되자 만주로 도망하여 일제가 침략의 첨병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신경군관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소학교 교사재직시 박정희의 비행은 이 때의 사회분위기상 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비밀에 부쳐졌는데 소문의 확산을 우려한 박정희는 만주에서 문경으로 제자였던 몇몇 여자아이에게 간특한 편지를 띄워 답장의 반응을 보며 문경 현지의 분위기를 엿보았다. 이때 낳아진 딸은 자식이 없던 형이- 이하생략.
일본이 항복한 후 박정희가 광복군을 찾아가 입대했다는 이야기도 허위날조된 새빨간 거짓말이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북평 판사처에서는 한국인으로서 일본군이 된 자들을 체포하여 본국으로 압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때 패잔병이 되어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일본군 중위 박정희를 붙잡아 송환한 것이다. 일본군 출신이 너무 많아 통솔의 편의를 위해 대대와 중대로 편성하여 송환하면서 이주일과 박정희 등이 이 들 대열의 중대장을 한 것 뿐이다. 이 때 대대장을 맡았던 신현호는 당시 일본군 대위로서 후일 초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냈고 중위였던 이주일이는 감사원장을 지냈다.
박정희 형 박상희에 관한 이야기들은 사실과 다른 내용들이 그동안 유포돼 왔는데, 사실은 일본인들과 어울려 친하게 지내고 일경의 밀정질을 하면서 재산을 크게 모아 부자가 된 자였다. 해방이 되어 상황이 변하자 신상에 불안을 느끼던 그는 호신책으로 좌익모임에 열심히 따라다니며 가담하기 시작했는데 어느날 학교 운동장에 모여있을때 경찰이 진주해 오자 제일 먼저 담을 넘어 도망치다가 중요인물이 도주하는 것으로 판단한 경찰의 사격을 받고 죽은 것이다.
박정희의 애비 박성빈은 어떠한 자 였던가? 이조말 학정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동학을 중심으로 봉기하자(동학농민혁명) 이를 토벌하는 관군과 일본군의 앞잡이를 하던 자였다.
박정희 집안에는 제대로 된 인간이 없다. 박정희의 맏형 박동희의 고약한 심사는 이미 일부 언론에 다뤄져 생략하거니와 그의 아들이자 박정희의 장조카 박재홍은 사병으로 군생활을 하였는데 그가 복무하던 부대주변등 에서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녀도 그가 제대할때 까지 CIC를 위시한 군수사기관이 제지할 수도 없었다. 또한 박정희 친누나 박재희는 친동생이 대통령자리에 있으면 누구보다도 국민으로서의 모범을 보이며 살아야 마땅할텐데도 박정희가 사준 십여대의 택시를 굴리면서 일체의 세금을 내지 않았고 불법운행을 단속하는 공무원에게 운전사들이 이 차가 누구네 찬줄 아느냐고 큰소리를 쳐가며 무법영업을 해도 당국이 이를 제재하지 못하였다. 그의 외아들이자 박정희의 외조카인 한모는 경동고등학교 재학시절 비행이 말할 수 없이 극심해 당연히 퇴학을 시켜야 했으나 외삼촌인 대통령 박정희의 위세에 눌려 퇴학처분을 못하고 3년간 유급을 시킨 끝에 억지로 졸업을 시킬 수 밖에 없었다. 후일 이 자는 청와대 넘버를 단 차를 몰고 다니며 엽색행각을 일삼다가 사람을 치고 도주하는 사고를 저질렀는데 경찰은 가해차량이 청와대 넘버를 단 차량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이를 은폐해 버렸다가 피해자의 가족들이 들고 일어나 언론기관에 호소하여 널리 알려지는 바람에 할수없이 구속시키기도 하였다.
박정희의 아들 지만이는 어떠한가? 그는 육군사관학교 1 학년생일 때 애비의 권력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다가 이를 나무라는 선배에게 폭행을 가하는 정규육사 개교이래 초유의 사고를 저질렀다. 그러나 육사에서 지만이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그 상급생은 후배에게 맞고 어떻게 사관생도 생활을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담을 넘어 강원도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버렸는데 오히려 피해자인 그를 군수사기관에서 탈영범으로 체포하여 처벌하려 한 적도 있었다. 오늘날 지만이는 근자에 이르기까지 청량리 사창가에 여러 해 동안 기거 하면서 마약과 대마초를 피워가며 윤락녀와 딩구는 생활을 하는 등 그 애비 박정희의 추악한 본색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아 유감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행각을 착실하게 계속하고 있다.
박정희의 조카(?)사위로 알려진 김종필은 어떤가? 그의 애비는 일제의 앞잡이로서 부여에서 면장질을 할때 얼마나 주민들을 가혹하게 괴롭혔는지 해방이 되자마자 충청도 부여군민들로 부터 집단몰매를 맞아 현장에서 즉사는 면했으나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김종필은 그런 꼴을 목격하고는 기특(?)하게도 제 애비의 죄과를 대신 속죄한다며 사병으로 입대했다가 불과 몇일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해 잡혀 와 수감되었다. 그후 순경시험에 떨어진 사람들이나 간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당시 인기가 없던 육사에 입교하는 조건으로 석방 되었던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