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화대통령’ 전 문화장관 자크 랑 인터뷰

프랑스 ‘문화대통령’ 전 문화장관 자크 랑
“6년 전 DJ에게 한 약속, 지금도 유효 – 문화 볼모로 한 미국 압력에 굴복말라”
박영신 기자 (오마이뉴스)

“귀국의 영화산업에 대해서 유럽, 특히 프랑스는 크게 탄복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미국이 한미투자협정(BIT)을 빌미로 스크린쿼터제도를 대폭 축소하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스크린쿼터 축소는 한국 영화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입니다. 스크린쿼터제도는 활력 있고 독창적인 한국 영화산업 발전에 기여한 바 크기 때문에 매우 모범적이며 유지돼야 합니다.

스크린쿼터제도는 또한 미국 영화산업의 독점을 상쇄시키기도 했습니다. 미국 제작자들은 스크린쿼터 축소 대가로 한국 영화제작에 많은 투자를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그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한국시장에 더 깊이 침투하기 위한 전략인 것입니다. 영화는 다른 산업과 달리 단순한 상품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호하고 지원하고 격려해야 할 예술입니다.(…중략…)한국 영화계의 싸움은 곧 우리의 싸움입니다. 유럽이 한국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지난 1999년 6월 25일 당시 프랑스 국회 외교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자크 랑 전 프랑스 문화장관이 우리나라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다.

자크 랑은 1958년 시작돼 오늘에 이르는 프랑스 제 5공화국 역사상 장관으로서 최장수 임기를 기록한 인물로, 총 12년에 걸쳐 문화장관과 교육장관을 지냈다. 그는 특히 사회당(PS) 소속 프랑수아 미테랑이 정권을 잡은 1981년부터 10년 동안 일명 문화대통령으로서 프랑스 문화의 새 지평을 연 주역으로 평가되고 있다.

프랑스의 초여름 밤을 밝히는 무료 음악축제는 1982년 자크 랑이 이룩한 대표적 업적 중 하나. 음악축제는 이제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으며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리오넬 조스팽 총리시절, 교육장관으로서 자크 랑이 남긴 기억도 흥미롭다. 지난 2002년 3월, 프랑스 전국 중고교에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전격 끌어들인 것. 그는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에 등장하는 ‘라 마르세예즈’의 짧은 멜로디를 비롯해 관현악으로 편곡된 베를리오즈의 공식 버전, 집시 출신의 재즈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의 재즈 버전, 발표 당시 여론을 들끓게 했던 세르주 갱즈부르의 레게 버전 등 총 14가지 다른 종류의 ‘라 마르세예즈’를 한 장의 CD에 수록해 배포했다. ‘라 마르세예즈’의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되새기자는 취지에서 CD를 교육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었다.

현재 프랑스 북부 도시 파 드 칼레 하원의원인 자크 랑은 여론조사 기관인 <소프레스>가 실시한 인기도 조사에서 45%의 응답자가 호감을 표시한 정치인이자 2007년 대선 승리에 가장 적합하다고 평가받은 인물 중 하나다. 자크랑은 여성 대통령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세골렌 루아얄, 도미니크 스트로스-칸과 함께 2007년 대선의 사회당 후보로 강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지난 24일 자크 랑 전 문화장관을 만났다. 빅토르 위고가 살았던 파리 마레 지구의 보주 광장 6번지와 이웃한 그의 집무실이 약속장소였다. 자크 랑 전 장관을 기다리는 동안 10분 간격으로 새로운 ‘손님’들의 발길이 분주하게 이어졌다. 기자에게 주어진 시간도 단 10분이었다. 그러나 자크 랑 전 장관은 빠듯한 일정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음에도 한 순간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나는 한국 영화인을 비롯한 국민들의 투쟁에 전면적인 지지를 표명한다. 스크린쿼터 현행 유지를 위한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할 준비가 돼있다. 국제적 지지를 호소할 생각도 있다.”

우리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계획과 관련해 자크 랑 전 장관은 “한국 정부가 문화를 볼모로 한 미국의 용납할 수 없는 압력에 굴복한 것”이라 진단했다. ‘국제법적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는 스크린쿼터를 축소하기로 한 한국의 결정’에 대해 그는 수차례에 걸쳐 “슬프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한국 영화예술을 질식시킬 목적으로 미국이 경제적 압박을 이용한다는 것은 수치”라고 말할 때는 언성을 높였으며 잠시 말을 잃고 침묵을 지키기도 했다. ‘문화적 예외’라는 표현을 프랑스에서 처음 탄생시킨 문화장관다운 반응이었다.

약속된 10분을 아쉬워하며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은 ‘한-불 수교 120주년’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자크 랑 전 장관은 양국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며 “프랑스는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자크 랑 전 장관의 문화 사랑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던 인터뷰 전문

“스크린쿼터 축소 요구는 미국의 문화적 암살이요 범죄”

- 지난 달 26일 한국정부는 스크린쿼터를 현행 146일에서 73일로 대폭 축소한다고 발표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개시에 대한 사회적 반발이 거세지자 지난 16일 노무현 대통령은 ‘FTA 협상 과정에 어떠한 압력도 없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한국의 상황을 충분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오래 전부터 실시돼온 스크린쿼터제도가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매우 효과적인 대책이라는 것은 말할 수 있다. 스크린쿼터제도는 수차례에 걸쳐 위협 받아왔지만 나 자신도 한국 영화인들에게 스크린쿼터 지지 의사를 표명한 바 있고 또 여전히 지지한다.

한국영화는 특히 훌륭하고 창조적이다. 불행히도 한국의 정부 책임자들은 문화를 볼모로 한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자국의 영화를 발전시킬 권리가 있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 압력을 행사하는 미국에 항의하며 미국 영화인 대표를 만난 일도 있다. 솔직히 국제법이나 세계무역기구(WTO)의 원칙도 영화에 관한 한국 법률을 바꿀 것을 강요할 수 없다. 이것은 오로지 정치적 통상압력이다. 우리는 특히 지난해 10월 유네스코(UNESCO)에서 각국의 문화자산을 교역의 대상에서 제외토록 하는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위한 협약(이하 문화다양성 협약)’을 통과시킨 바 있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의 독재적 요구’에 법적으로 자유롭다. 한국 정부는 문화다양성 협약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다. 한국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소식을 듣게 되어 슬프다. 대단히 슬프다.”

- 한미 FTA 협상이 한국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한-미 양국이 상업적, 경제적 협정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미국 영화에 이익을 챙길 심산으로 미국이 한국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옳지 않다. 나는 한국인들이 이 같은 미국의 압력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예술적 창작물을 비롯해 자국의 문화를 보호해야 한다. 미국은 전 세계에 절대자로서 자연스럽게 군림하려 한다. 그러나 각각의 국가들은 자국의 예술가, 창작자를 배려하며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 나는 ‘대단히 대단히’ 슬프고 분노한다. (한국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이) 확정적인가?”

- 정부는 오는 7월부터 시행한다는 계획이다.
“한국 영화인을 비롯한 국민들의 투쟁에 전면적으로 지지한다. 스크린쿼터 현행 유지를 위한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할 준비도 되어 있다. 국제적 지지를 호소할 생각도 있다. 한국에는 뛰어난 영화인들이 있다. 한국영화는 특히 칸 국제영화제를 통해 국제적 명성을 획득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 영화예술을 질식시킬 목적으로 미국이 경제적 압박을 이용한다는 것은… 이것은 수치다. 문화적 암살이요 범죄다.”

“프랑스는 외규장각 도서 한국에 반환해야”

- 한국에서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을 FTA와 연관짓는 시각도 있는데.
“물론 세계 경제의 분위기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부(富)의 양극화 현상에 대한 책임은 우선 해당 정부에 있다. 불평등 해소를 위해 정부가 재원을 분배해야 하는 것이다. 경제 불평등 현상은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도 존재한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우리가 무조건 국제연합(UN)이나 유럽연합(EU), 제네바관세협정(GATT) 등에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많은 부분 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다. 내가 한국 내정을 간섭할 수는 없는 일이나 이 문제는 우선 한국정부가 풀어야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 당신은 ‘문화적 예외’를 주창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문화적 예외’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바로 나다. 문화는 다른 일반적인 공산품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 문학, 음악, 영화, 회화를 일반 공산품과 동일시할 수 없는 까닭에 국가뿐만 아니라 국제적 차원에서도 이들을 위해 특별한 보호 혜택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자산은 통상협정 대상이 될 수 없다. 문화는 각 국가의 주권을 상징하므로 엄격히 보호돼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문화적 예외’는 국가가 모든 형태의 경제적 위협으로부터 자국의 창작자와 예술인, 문화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문화적 예외는 예술과 문화 보호를 위한 특권을 요구한다. 주의 깊게, 열정적으로 문화 예술을 보존하고 보호하는 것은 국제사회와 각 정부의 의무다.”

- 올해는 한-불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해다. 한국 국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은 엄청난 외세의 침략과 식민을 감내하며 고통 받은 나라다. 그러나 오늘날 주권과 능력 면에서 완전히 인정받은 위엄 있는 문화국이다. 한국은 경제 성장뿐만 아니라 문화 분야에서도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과 프랑스가 현실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바란다.

내가 장관으로 있을 때 한국의 권위를 인정하는 상징으로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에 보관돼 있는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결정한 바 있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과 나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차기 자크 시라크 정권은 이 결정을 재고한다며 백지화했다. 외규장각 도서는 한국의 것이며 한국이 가진 기억의 일부이기에 프랑스는 반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는 것은 한-불 수교 120주년을 축하하는 강렬한 상징이 될 것이다. 나는 한국과 프랑스가 매우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양국 관계가 장수하기를 기원한다.”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13606&ar_seq=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