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권뉴스 2007. 6. 20]
[논평] 사회운동은 최장집의 운동한계론(정당만능론)에 모욕당해 마땅한가?
최덕효(대표 겸 기자)
사회운동에 대한 각계의 모욕이 점입가경이다. 한나라당이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을 좌파라고 제멋대로 규정하고 이들의 과오를 진보진영과 동일시해 비난하는가 하면, 대선후보로 당을 옮겨 다니기 바쁜 손학규 같은 이도 심심하면 진보진영이 무능하다고 꾸짖는 세상이다.
이번에는 최장집이 가세했다. 6월 16일 한겨레신문의 [한국사회 미래 논쟁] ‘최장집 교수와의 좌담’에서 그는 ‘운동한계론’을 설파하면서 대안은 “정치참여와 정치활동 밖에 없다”고 예의 ‘정당만능론’을 강조했다. 그의 발언이다.
“민주화 운동은 시대적으로 볼 때 역사적 역할이 끝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운동의 역할이 끝났고, 운동세력이 해체됐다는 이 말을.. 효능면에서 운동은 항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고, 과거 민주화운동시기처럼 분명한 목표도 없다. 다룰 수 있는 이슈도 한미에프티에이 반대냐 찬성이냐와 같이 찬반양론으로 구분될 때만 가능하다. 복잡한 이슈는 운동이 다루기 어렵다.“
최장집은 노무현 정권에 대해 ‘개혁적 환경은 좋았는데.. 무산시켰다’며 노(盧) 비판의 선두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특히 올 12월 대선과 관련하여 이른바 범여권이 한나라당이 집권할 경우 당장 대한민국이 망할 것 같이 아우성을 치는 것에 대해 국민들을 상대로 ‘두려움을 동원하는 것’이라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학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왜 ‘(운동은) 복잡한 이슈를 다루기 어렵다’며 한국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종언을 고하는 발언을 했을까. 민주화 운동을 권력의 이력서로 과대포장한 이들에 대한 경종인가. 민주화 운동의 속살인 민중 운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인가.
여기에는 분명 국내외 사회적 이슈를 슬기롭게 풀어내지 못한 사회운동세력의 미진한 역량과 책임이 부분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장집의 비판의 날은 여야에 포진한 권력형 386들과 현 운동세력을 단순 동일시한데서 기인한 발상이 아닌지 의아심이 든다. 게다가 최장집이 한나라당처럼 이들 386을 좌파로 보고 있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최장집이 좌담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자체가 한국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만들고 사회경제적 문제를 악화시킨다고는 보지 않는다”면서 “신자유주의가 세계의 보편적 가치이자 원리가 된지 오래”라고 주장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는 최장집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을 단행한 김대중 정부에서 정책기획위원장을 지낸 인물임을 상기한다면 노 정권의 무능을 거듭 비판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노(盧)의 신자유주의 추종에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그의 정체성과 잘 맞아 떨어지는 대목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회운동은 한미FTA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극명한 사례로 간주해 반대한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과거 식민주의의 연속선상에서 ‘신식민주의’로 규정하며 따라서 진보진영에서는 한미FTA 앞에서 알아서 기는 노무현정부 관계자들을 ‘신자유주의광신자‘라고까지 부르지 않는가. 이에 대한 최장집의 논리가 천박하다. “신자유주의가 세계의 보편적 가치”라는 그의 주장을 확대 해석하면 지난시기 영국을 중심으로 열강들이 제3세계의 민중들을 착취한 가공할 식민주의도 “세계의 보편적 가치”가 된다. 말이 되는가.
그렇다면 진보적 사회운동과 반대편에 선 최장집이 노무현의 무능에 힘입어 새로운 개혁의 전도사인양 ’운동한계론’으로 훈수 두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요즘 부쩍 6월항쟁에 대한 재해석이 분주하다. 이른바 ‘민주개혁세력’으로 상징되는 6월항쟁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는 논쟁이 사회운동진영 내에서 활발하게 일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6월항쟁에 이어 7,8,9월에 등장한 노동자대투쟁의 정신이야말로 진보진영이 펼쳐나갈 운동의 단초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날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는 추세다. 6월항쟁은 이미 ‘박제화’ 란 용어와 공존하고 있다.
최장집은 ‘정치학’을 전공한 학자다. 학문 자체가 제도권에 매우 친숙한 분야라서 그런지 그는 ‘제도권 민주주의’에 관심이 많으며 당연히 그에 수반하는 정당정치의 발전을 희망하는 발언이 주를 이룬다. 문제는 그가 실제 민주주의 내용을 담 – 보할 수 있게끔 양극화에 고통받고 있는 민중적 삶에 얼마나 깊이 천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 12일 한겨레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올해 대선에서 이른바 ‘진보개혁세력’이 선택할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 국민들의 36.5%는 ‘기존 정당과 거리를 두면서 진보개혁세력의 독자적 위치를 지키는 것’이라고 답한 바 있다. 범여권과의 연대는 23.4%, 민주노동당 중심의 결집은 6.3% 였다.
이렇듯 다수 여론은 정당을 신뢰할 수 없는 집단으로 보고 진보진영에게 독자적인 활로를 찾을 것을 주문하고 있다. 민의가 정당 대신 운동에서 대안을 찾고 있는 부분이 많다면 최장집이 정당만능론은 모순이 된다. 조건이 미성숙된 환경에서 운동가들의 섣부른 제도권 진입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우리는 익히 보아오지 않았는가. 최장집의 논리라면 운동(?)을 디딤돌로 삼아 졸속 정당을 만들어 특정 세력의 2중대 역할을 자임하려는 일단의 움직임이 환영받을 만 한데 과연 그런가.
최장집이 운동에 훈수를 두려면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을 두루 섭렵하고 실전을 체험한 사회운동가들보다 더 많은 학습량과 통찰력이 필요하다. 또한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다. 특히 신자유주의에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 관제성이 농후한 시민운동을 운동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문제가 많다. 자신의 전공분야 하나를 가지고 ‘복잡한’ 사회현상을 함부로 재단하려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물론 진보적인 사회운동진영은 권력형 시민운동과 분명하게 선을 긋고 민중운동의 지평을 활짝 열어감으로써 ‘운동’에 대한 모욕을 타개해야 할 것이다. 모욕이 누적되면 기정사실화 된다. 사회운동 쪽에서는 다소 번거롭더라도 무리한 모욕이 발생하면 그때그때 쳐주어야 한다. [한국인권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