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알코올 의존 전문병원, 주류협회 횡포로 문 닫을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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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싼 와인’ 권하며 ‘주폭’ 때려잡는다고?

알코올 의존 전문 치료기관인 카프(KARF) 병원이 존폐위기에 놓였다. 병원 재원을 책임지던 주류산업협회(협회장 권기룡)가 당초 약속한 출연금 지원을 작년 10월부터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류협회는 ‘낮은 효율성’을 이유로 들며 재단 건물 매각과 병원 사업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병원 재단인 음주문화연구센터와 시민단체들은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알코올 의존 관련 정부 정책이 사실상 전무한 상황에서 그나마 전문적으로 치료와 재활을 담당하던 기관을 없앨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 주류협회가 ‘주류 소비자에 대한 판매자로서의 책임’을 내걸고 출연을 약속했었던 만큼, 폐원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11일 이 같은 양측의 상반된 입장이 민주통합당 김용익, 김현미, 윤호중, 이학영, 박원석, 유은혜 의원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주최로 열린 ‘대한민국 음주 정책의 현주소와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해체 논란’ 토론회에서 맞부딪쳤다.

이들은 한국의 음주정책이 ‘수준미달’이라는 점에 대체로 공감했다. 그렇지만 카프 병원 존치를 위한 주류협회의 역할을 둘러싸고는 뚜렷한 입장 차이를 보였다.

이날 토론회에는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과 이상윤 건강과대안 책임연구원이 발제를 맡았다.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상임연구원, 박직명 음주문화연구센터 이사, 이준규 보건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장, 이종진 주류협회 상무이사도 토론에 나섰다.

1인당 알코올 소비량 세계 13위, 알코올 의존자 160만 명

토론회는 한국의 수준미달 음주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됐다. 보건의료정책연합 우석균 정책실장이 첫 발제자로 나서 한국 음주문제 현황과 정책현황을 설명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해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05년 기준 한국의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은 14.8L로 WHO 회원국 188개국 중 13위였다. 몰도바, 헝가리, 러시아 등 개발도상국을 제외하면 사실상 최상위에 해당한다. 또 2012년 국민건강통계를 보면 한국의 1인당 월간 음주율은 남성 77.0%, 여성 59.4%에 이른다. 한 달에 3주는 술을 마신다는 얘기다.

술로 인한 사망·질병 문제도 심각하다. 2008년을 기준, 음주로 인한 사망자수는 전체 사망자의 9.4%를 차지했다. 반면 미국은 4.5%, 캐나다는 3%, 독일은 4.8%, 뉴질랜드는 3.3% 수준이다. 음주문화연구센터 박직명 이사는 “한국에 알코올 의존자가 약 160만 명이 있고, 알코올 의존자 1인이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평균 40명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며 사실상 전 국민이 술로 인한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WHO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 재작년 ‘해로운 음주감소를 위한 세계전략’을 결의했다. 한국정부도 함께한 이 결의문은 주류 마케팅을 규제하고, 주류 판매의 시간과 장소를 규제하라고 권고했다. 또 알코올 의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조기에 선별해 치료·재활 프로그램을 쉽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명시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이 결의문을 대부분 지키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지정 알코올사업단이 펴낸 ‘음주폐해감소를 위한 국가전략 2020′을 보면 음주문제를 효율적으로 예방하고 치료할 만한 사회적 인프라가 매우 취약하다. 알코올상담센터는 2010년 기준 41개소로, 목표로 했던 96개소에 훨씬 못 미치는 상황이다. 보고서는 “예산과 인력 부족으로 서비스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한계가 있음”이라고 지적했다.

우 실장은 “이 보고서를 낸 알코올사업지원단의 예산조차 국가예산이 아니라 주류업계가 재원을 출연한 음주문화연구센터 재원”이라며 “정부 차원의 음주 관련 정책은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 정부는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 더 싼 와인을 마실 수 있다는 홍보를 한다”며 “국가가 나서서 술 홍보를 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또 우 실장은 “한국의 음주 정책은 주류 판매를 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제한하지는 않고, 오직 소비자에게만 ‘절주’ 책임을 떠맡기고 있다”며 “주류도 담배처럼 유해물질로 인식하고 정부가 각종 규제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술 마시라 권해놓고, 마시면 때려잡기?

막무가내식 ‘주폭(酒暴)’ 잡기가 해결책이 아니라는 주장도 이어졌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올해 “건전한 음주문화를 조성하겠다”며 ‘주폭척결’을 내세웠다. <조선일보> 등 언론은 이에 발맞춰 수십 개의 주폭 척결 기사를 쏟아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연맹 이상무 위원장은 “‘주폭척결’은 즉흥적 처방에 불과”하다며 “하루 종일 술 광고가 넘쳐나는 ‘술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데 알코올 의존을 개인 문제로 떠넘겨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우 실장 역시 “주폭은 범죄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며, 이들에 대한 책임은 사회가 져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전문가들이 ‘절주’ 캠페인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한다”며 “술에 대한 접근성을 줄이고 사회가 경각심을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 김명희 연구원은 “한 사회의 평균 음주량이 늘어나면 자연히 과도 음주자도 늘어난다”고 분석했다. 이어 그는 “우리 사회의 술은 더 이상 ‘문화’가 아니다”며 “주류업계가 산업화·독과점화 되면서 막대한 정치·경제력을 가지게 됐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규제를 원천봉쇄하며 광범위한 마케팅에 돈을 쏟아 부은 결과 음주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이런 상황에서 음주 일탈자와 건강한 시민을 양분해 일탈자만 격리하면 된다는 발상은 안이하다”며 “음주문제에서 경찰은 빠져야 한다. 보건복지부가 주체가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도 한국의 음주정책이 ‘수준미달’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이준규 보건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정부 차원의 음주 정책이 미흡한 것은 사실이다”라고 인정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5일 대학 캠퍼스를 포함한 공공장소에서의 음주와 주류 판매를 금지하는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이 과장은 “개정안을 두고 주류광고회사에서 민원전화가 많이 들어오는 상황”이라며 “이 법안이 반대압력을 뚫고 국회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한국주류산업협회 홈페이지. “협회와 회원사는 소비자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는 문구가 눈에 띈다ⓒ주류산업협회 홈페이지 캡처

유일한 인프라 카프병원, 주류협회 횡포로 존폐위기

이날 토론회 참석자들은 “바람직한 음주 정책의 출발점은 음주 예방·치료 전문기관인 음주문화연구센터 정상화”라고 입을 모았다.

음주문화연구센터는 1997년 설립됐다. 당시 건강증진부담금을 주류에도 부과하려는 국회 입법 발의 시도는 주류업계의 반발에 부딪쳤다. 주류업계는 ‘자체’적 주류소비자보호사업을 내세우며 연간 50억 원을 출연, 알코올 관련 연구·예방사업과 전문병원·사회복귀시설 건립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2000년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가 설립됐고 2004년에는 경기도 고양시에 카프병원이 개원했다.

병원은 알코올 상담센터, 알코올 의존자 공동생활시설, 직업재활시설, 개인생활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비영리 원칙을 고수해 월 입원 치료비가 70~80만 원 선이다. 그러다 보니 여타 알코올 치료기관에 비해 접근성이 낮은 편이다. 박직명 음주문화연구센터 이사는 “보건복지부에서 지정한 알코올 전문병원이 있지만, 카프처럼 알코올 의존을 ‘진행성 질병’으로 인식하고 입원부터 사회복귀까지 재활을 돕는 전문기관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카프병원은 존폐위기에 처해있다. 2005년 주류협회는 돌연 출연금구조의 불안정을 이유로 보건복지부에 재단건물 매각과 병원사업 포기 등을 요구했다. 작년 3월에는 주류협회가 재단 사업에 직접 관여할 수 있도록 정관을 개정하기도 했다.

이에 보건복지부가 “주류협회장이 재단 이사장을 겸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지만 재단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주류협회는 급기야 지난해 10월 “출연자가 원하지 않는 병원사업을 지속하고 있다”는 이유로 지원금 출연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출연 미납금은 현재 110억 원을 넘는다.

박 이사는 “주류협회의 출연거부는 대국민약속을 깨는 행위”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협회가 ‘사회적 책임’ 명목으로 출연하던 지원금을 손에 쥐고 재단 사업에 이래라 저래라 관여하는 것은 점령군의 횡포와 다를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상윤 건강과대안 책임연구원은 “문제는 정부가 주류업계의 ‘자체노력’을 믿고 협회 출연금에 모든 것을 맡긴 것”이라며 “보건복지부가 앞장서서 주류협회에 ‘의무적’으로 알코올 정책 집행 및 실행을 위한 일정액의 출연금을 강제하는 방안을 만들고, 센터 이사회에 주류협회 관련 인사들이 개입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음주문제의 원인제공자인 주류협회에 생산·유통시키는 알코올 양에 비례하여 ‘(가칭)알코올피해예방분담금’을 납부하도록 해 이것으로 ‘알코올 피해예방기금’을 조성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주류협회 이종진 상무이사는 “병원은 계속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상무이사는 “알코올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치료와 재활이 아니라 건전 음주문화 조성”이라며 “술에 대한 예절·예방 교육과 그 홍보에 재원 활용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50억 원의 출연금으로 아무런 가시적 성과도 없는데 왜 출연금을 부담해야 하냐”며 “50억 이면 주폭 근절을 위해 다양한 캠페인 사업을 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

이날 토론회가 끝나기 전 한 청중은 자신을 “30년 동안 술을 마시며 가족들에게 말로 다 못할 고통을 안겨줬던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카프 병원의 재활프로그램을 통해 8년째 단주를 이어가고 있고, 비로소 직장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나처럼 카프 병원을 통해 인생을 새로 살게 된 사람이 정말 많다”며 “주류협회가 책임지고 카프 병원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최하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