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후보의 정책공약집에는 응급의료체계를 개선하겠다는 공약이 담겨 있다. “사고로부터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겠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손길, 응급의료체계 개선”이라는 제목 아래 적혀있는 공약들이다.
우리나라 응급의료체계는 해결되어야 할 여러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실정이므로 박근혜 후보가 어떤 곳에 중점을 두고 있는지 궁금해 살펴보았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 공약집에 담긴 응급의료체계 개선 방안은 심도 있게 살펴볼 여지가 없는 단출한 내용이었다.
박근혜 후보 정책공약집은 ‘심폐소생(CPR)에 대한 대국민 교육이 부족해 국민들의 심폐소생술 실시율이 OECD 평균 20%에 크게 못 미치는 1.4%에 그치는’ 점을 우리나라 응급의료체계의 주요한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응급의료체계 개선을 위해 첫 번째로 내건 것이 학생들에게 심폐소생술 교육을 의무화 하겠다는 것이다. 아래 공약집에 실린 내용을 보자.
새누리의 약속
- 초,중,고등학교에 심폐소생(CPR)교육 의무화
- 다중이용시설 등에 심장제세동기 보급 확대
- OECD 국가 수준으로 ‘응급의료전용헬기’를 확충하여 도서, 내륙 산간 고립지역 응급환자 구조, 구급 강화
- 응급처치자(구급대원)의 응급처치 결과 피해구제를 위한 제도 기반 구축
수많은 중증 응급질환은 다 제쳐 두고 대상을 심장마비 환자로 국한했다는 점에서부터 한계가 보인다. 이를 테면 사고로 팔다리가 잘린 중증 외상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뿐만 아니라 심장마비 환자를 위한 대책으로서도 부족하다. 심폐소생술은 그 자체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요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정지가 발생하고 4-5분이 경과하면, 뇌가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받기 때문에 뇌 손상이 오는 시간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해 심장을 겉에서 눌러 짜주는 것이 심폐소생술이다. 심폐소생술을 신속하게 받기 시작하여 빠르게 응급의료센터로 이송되고 빠르게 의학적 조치를 받는 과정이 연쇄적으로 일어나야 심정지 환자의 소생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심장협회의 가이드라인에서는 이를 ‘생존 사슬’이라고 이름 붙인 바 있다.
국민들의 심폐소생술 실시율이 낮은 것은 개선되어야 할 문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을 개선한다고 해서 응급의료’체계’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유기적인 응급환자 이송체계도, 양질의 응급의료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심폐소생술 보급은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심폐소생술을 아무리 잘 해도 응급차가 오지 않는다면, 혹은 근처에 적절한 응급의료센터가 없다면 ‘생존 사슬’은 끊어지고 만다.
▲ 미국심장학회 생존사슬 가이드라인(2010) | |
ⓒ 미국심장학회 | 관련사진보기 |
산간, 도서지방을 위해 헬리콥터를 늘린다지만 이것 역시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다. 90% 이상 민간에 맡겨져 있는 병원들이 자신들의 수익 구조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 수지를 맞추기 위해 응급실을 축소시키거나 폐쇄하고 있는 현실을 내버려 두고서 헬리콥터만 가지고 응급의료체계를 개선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응급의료체계 개선의 문제는 어떻게 의료의 공공성을 확보해낼 것이냐의 문제가 핵심이다. 사실 영리병원 찬성 입장을 가지고 있는 박근혜 캠프로선 이 부분에 관심이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응급의료체계 개선 공약은 끼워 넣기 식의 부실공약이다. 급조해내느라 공약의 내용이 부실하다는 점은 차라리 큰 문제가 아니다. 이 공약에서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는 문제는 의료에 대한 시각 자체다. 박근혜 후보의 공약에서는 응급의료체계 개선의 책임을 개인들에게만 돌리고 있는 시각이 엿보인다. 제목에서는 ‘사고로부터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더니 국가가 나서서 응급의료체계를 만들어 놓겠다는 내용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다. 대신 심폐소생술을 가르쳐 줄 테니 국민들이 나서서 응급환자를 살려내라는 요구만 담겨 있을 뿐이다. 이런 걸 왜 공약집에 넣어서 홍보하고 있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박근혜 후보는 지난 10일 TV토론에서 “경제민주화는 줄푸세와 다르지 않다”고 말해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개념에 대한 이해가 독창적이기 때문에 유권자들로선 하나하나 다시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박근혜 후보가 말하는 ’100%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지하경제’는? ‘복지’는?
박정희 전대통령은 생전에 10월 유신에 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유신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자기 집 앞을 자기가 쓰는 것이 유신이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박근혜 후보와 닮았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복지국가를 실현 하겠다면서 그의 아버지와 비슷한 말을 하지않을까 걱정된다. ‘복지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자기 집 앞에서 발생한 응급환자는 자기가 살려 내는 것이 복지다’ 라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의사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