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한국 의료의 빈부 양극화, 해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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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개방저지공대위는 <위기의 한국의료, 어디로 가야하나> 라는 주제로 프레시안에 의료제도 관련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

[프레시안] 한국 의료의 빈부 양극화, 해법은?  
위기의 한국의료, 어디로 가야 하나 <1> 현실 진단과 해법

  
  한국의 의료가 위기에 처해 있다. 한편에서는 의료 수준이 낮다며 돈 싸들고 외국으로 나가는 부자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치료비가 없어 전세방을 빼고 퇴직금으로라도 급한 불을 꺼 보고자 직장마저 그만 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외국 의료기관을 들어오라고 주장하는 부자들이 있는가 하면, 주변에서 푼돈을 꾸다 못해 결국 딸의 인공호흡기를 떼어낼 수밖에 없었던 애비가 존재하는 현실. 더 비싼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찾는 소수의 부자들과, 의료사각지대에 방치된 있는 수백만명의 서민들. 1997년 IMF위기 이후 진행돼 온 부의 양극화는 이렇게 의료의 양극화까지 초래하고 있다.
  
  이렇게 위기에 처한 한국 의료에 희망이 있을까?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의료보장의 강화와 의료공공성의 강화가 이러한 문제의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정부에서는 의료의 산업화만이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보고 있다. “고급의료 수요에 대처할 수 있는 고급의료의 창출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의료를 개방하자”, “자본참여를 활성화하여 병원을 영리병원으로 만들어 주식회사로 만들자.”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경제자유구역, 기업도시, 지역특구, 사회간접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 등이 바로 이것을 현실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다.
  
  사실 국민들의 바람은 소박하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병이 들어 치료도 못 받는 상황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다. 즉 의료만큼은 정부가 책임을 져 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서민들의 바람이다. <프레시안>은 건강한 사회를 지향하는 보건의료인들의 모임인 ‘의료 개방저지 공대위’와 함께 과연 어떠한 방향이 우리의 의료가 가야할 길인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특히 한국 의료의 문제점, 민간의료보험과 영리병원이 과연 대안인지, 공공의료체계를 둘러싼 오해는 무엇인지를 미국, 스웨덴, 영국, 싱가포르, 대만, 중국 등의 구체적 사례를 놓고 관련 보건의료 전문가들의 6회에 걸친 진단과 분석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의료 개방저지 공대위’는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노동건강연대 등 6개 단체로 이루어진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과 평등사회를 위한 민중의료연합, 건강세상네트워크, 사회보험노동조합 등 한국보건의료부문의 진보적 단체를 망라한 연대 단체이다. 편집자.

  
  위기의 한국의료, 현실 진단과 해법
  
  요즘 한국 의료의 속내를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한결같이 ‘내우외환의 위기 상황’이라는 데 입을 모으고 있다. 위기의 징후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우선 급증하는 의료비 지출이다. 1995년 5조원이던 건강보험재정 지출이 2003년 현재 16조원으로 무려 3배 이상 증가했다.
  
  병원업계의 상황도 심상치 않다. 병원협회의 추산에 따르면, 1998년 3.7%이던 병원 도산율이 2002년 9.5%로 급증했다. 상당수의 병원이 경영적자를 호소하고 있는데, 이를 단지 병원업계의 엄살로 치부하기는 곤란한 실정이다. 의료에 대한 국민의 반응도 위험 수위다.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의료소비자권리찾기’ 토론방에는 개설 6일만에 1천3백50여건의 의견이 올라왔고, 조회 건수만도 20여만 건에 달했다. 게시된 의견의 대부분은 병원과 의사, 그리고 정부의 의료정책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불만을 여과없이 드러낸 것들이었다. 여기에다 2006년 예정된 의료시장 개방은 한국의료에 대한 불안감을 한층 가중시키고 있다.
  
“한국 의료의 위기, 고령화 진행될수록 더 본격화될 것”


      
  문제의 심각성은 아직도 한국의료의 위기가 본격화된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한국에서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급속한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인구 고령화는 다양한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그 중 하나가 의료비 급증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2001년 현재 33조, GDP의 6.1%를 차지하고 있는 국민의료비는 고령사회로 진입하는 2020년경에는 1백71조, GDP의 11.4%로 증가하고, 2040년경에는 7백43조, 2050년경에는 1천2백87조로 GDP의 26.5%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추정된다.
  
  노인 부양비가 높아지면서 국가 생산성이 현저히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사회가 과연 이 같은 의료비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지 매우 우려되는 상황이다. 한국의료의 위기를 진단하고 해법을 마련하는데 있어 의료비 지출을 ‘적정화’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병원의 위기는 ‘의료의 과잉’이 빚어낸 구조적 문제”
  
  한국은 의료장비의 본산이랄 수 있는 미국보다 더 많은 고가 의료장비를 보유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 백만명당 CT와 체외충격파쇄석기 보유대수는 30.9대(미국 : 13.1대)와 6대(미국 : 2.9대)로 미국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 병상 수도 마찬가지다. 인구 천명당 급성병상수의 OECD 평균이 3.1병상인데 반해 한국은 5.2병상에 이른다. 게다가 매년 3천5백여명에 달하는 신규 의사가 배출되고 있다. 병원의 출혈, 과다경쟁이 불가피하다.
  
  특히, 경제적 합리성을 갖추지 못한 병원 구조는 한국의료를 정상화하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규모의 경제’에 미달하는 3백병상 미만의 중소병원이 전체 병원의 83.1%, 병상 기준으로는 54.1%에 달한다. 의료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과거에는 굳이 ‘규모의 경제’를 충족시키지 않아도 병원 운영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과잉상태로 접어든 지금, 더 이상의 정상적 병원 운영은 불가능해졌다. 일부 병원은 도산했지만, 더 많은 수의 병원은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비용을 줄이고, 매출을 늘리는 생존전략을 택하고 있다. 병원인력 감축과 노동조건 악화에 따른 의료의 질 저하, 매출 증가를 위한 과잉진료와 부당청구 등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같은 ‘의료의 과잉’은 한국의료의 미래를 설계하는데 있어 인구 고령화와 더불어 큰 우환거리이다.
  
  “의료의 양극화, 불만의 양극화”


  
한국의 의료가 위기에 처해 있다. 1997년 IMF위기 이후 진행돼 온 부의 양극화는 이렇게 의료의 양극화까지 초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모든 것이 시장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사회 전반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의료도 예외가 아니다. 매년 적지 않은 수의 부유층 환자가 질병 치료를 위해 미국병원을 찾고 있는데, 여기에 드는 비용이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돈이 없어서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일선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 같았으면 벌써 병의원을 찾았을 환자들이 2천~3천원 하는 진료비 부담 때문에 병의원 찾기를 꺼린다고 한다. 가족 중에서 중한 환자가 생기면, 집 팔고 전세금 빼는 경우도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우려되는 점은 의료이용의 양극화가 건강의 양극화로 이어질 가능성이다. 이미 그런 조짐은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울산의대 강영호 교수가 최근 분석한 바에 따르면, 학력과 경제력이 낮은 계층이 중류 이상의 계층보다 사망위험이 1.5~2배 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나 건강의 양극화가 고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의료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제각각이다. 부유층은 의료서비스 수준을 탓한다. 한마디로 기대수준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돈을 더 내도 좋으니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해 달라는 요구다. 이에 반해, 상당수의 국민은 의료비가 비싸다고 호소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과 크기로 볼 때, 응당 후자의 불만 해소에 정책적 우선순위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정부정책 방향과 언론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의제는 이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오히려 ‘다양화되고 고급화된 의료수요를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에 더 많은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고급의료에 대한 ‘선호’를 보장하기 위해 대다수 국민의 필수의료에 대한 ‘권리’를 배제하거나 축소하려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의료와 건강의 양극화는 이해당사자간의 갈등을 유발할 뿐 아니라 갈등구조를 고착시킨다는 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위기의 한 측면이다.
  
“의료시장 개방, 병원업계의 공갈ㆍ협박”
  
  많은 이들은 의료시장이 개방되는 2006년이면, 파란 눈의 외국인 의사가 한국으로 물밀 듯이 몰려 올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루빨리 한국의료를 옭아매고 있는 각종 규제를 철폐해서 자유경쟁체계를 갖추지 않으면, 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2006년의 상황은 그야말로 상상에 그칠 공산이 크다. 현재 WTO DDA 서비스 개방협상이 진행 중인데, 자국의 의료인력을 선진국으로 수출하려는 일부 개발도상국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가 의료시장 개방에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다수 선진국들은 ‘의료의 공공성’을 근거로 서비스 협상 대상에서 의료를 제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정황을 모를 리 없는 이들이 한사코 의료시장 개방을 들먹이는 데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 병원업계는 이 사안을 정부에 규제 완화를 요구할 수 있는 호재로 인식하고 있다. 영리법인 허용, 민간의료보험 확대, 의료기관의 건강보험 탈퇴 허용 등을 요구할 때마다 ‘의료시장 개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논리가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에는 정부의 이해관계도 일치한다. 시장 원리에 맡기는 의료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정부의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의료시장 개방이라는 외부의 위기요인은 사실상 한국의료 내부의 문제이다. 실체도 없는 외부의 위기를 들먹이면서 편법적으로 최소한의 규제조차 없애겠다는 것은 한국의료의 위기를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집 대들보가 썩어 무너져 가는데, 오지도 않을 손님 맞겠다고 대문에 페인트칠하는 꼴은 면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과연 우리의 대안인가”
      

  한국의료는 보편적 국제규범에서 한참 동떨어져 있다. OECD 국가를 비교해 보면, 한국은 멕시코, 미국과 함께 시쳇말로 ‘독도’다.
  
  이런 경향은 각국 국민의 건강수준과 의료제도에 대한 만족도 조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독도’ 국가의 건강수준과 만족도가 다른 국가보다 뒤쳐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국민의료비에서 공공재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적은 재원으로 더 나은 의료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국제 연구의 공통된 결론이다.
  
  현재 한국의료의 진행방향은 미국의 위치로 수평이동하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한국의료의 바람직한 귀착점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많은 선진국이 우리보다 앞서 인구 고령화와 의료의 과잉을 경험하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현재의 의료제도를 갖추게 된 것이라면, 대다수 OECD 국가가 위치한 방향이 보다 나은 대안이 아닐는지?
  
“한국의료, 어디로 갈 것인가”
  
  거시경제지표가 아무리 좋아도 민생이 계속 피폐해져 간다면, 그 경제를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의료서비스 수준이 아무리 높아도 의료제도의 재정적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거나 상당수의 국민이 자신의 질병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바람직한 의료라고 할 수 없다.
  
  정부는 의료부문에 자본참여를 활성화시켜 의료를 산업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일관된 정책기조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은 그렇지 않아도 과잉상태에 있는 한국의료를 폭발직전의 상황으로 내몰게 될 가능성이 크다.
  
  정확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정확한 원인 진단이 필요하다. 한국의료에 부족한 것은 ‘활성화’가 아니라 ‘적정화’다. 실체 없는 외부의 위기를 근거로 한국의료의 진짜 위기를 간과하는 경향도 경계해야 한다. 과잉투자를 조장하고, 의료의 영리화를 부추기는 정책은 국민의료비 급증에 대한 사회적 대응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곧 본격화될 한국의료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화려한 ‘외양’이 아니라 ‘내실’을 단단하게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진석/충북의대 교수,의료관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