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서 공동집필
이진석 (충북대 교수)
조홍준 (울산대 교수)
임 준 (가천대 교수)
최용준 (한림대 교수)
황상익 (서울대 교수)
정세환 (강릉대 교수)
권영규(대구대 교수)
『경제자유구억설치및운영에관한법률 개정안』에 대한
재경위원회 전문위원 검토보고서에 대한 의료계 및 시민단체 의견서
정부가 발의한 경제자유구역내의 외국병원 설립과 외국병원의 내국인 진료 허용을 골자로 하는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안은 최소한의 현실성과 경제적 합리성조차 갖추지 못한 졸속 정책인 동시에 국내 의료제도의 근간을 뒤흔드는 국민건강 파괴정책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국회 재경위 전문위원이 작성한 검토의견서는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외국병원의 내국인 진료허용 부분을 모범적 내용이라 치켜세우고 있어, 국민들과 국회의원들에게 매우 왜곡된 정보를 제공할 우려가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반대의견을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제출하며, 정부발의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안이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양질의 의료시설을 세우는 것이 경제자유구역의 성공적 정착을 위한 필수적 요인이며, 따라서 외국병원을 유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은 심각한 논리적 오류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 번째는 ‘양질의 의료시설이 반드시 외국병원만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미 국내 치료의학기술의 수준은 세계적인 수준이며, 전경련이 2003년도에 주한외국기업 외국인 임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대부분의 외국인 임직원이 의료서비스의 수준에 대해서는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양질의 의료시설을 위해 반드시 외국병원을 유치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두 번째는 ‘외국의 일류 고급병원이 경제자유구역 외국인의 의료이용 편의를 제대로 보장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 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이유는 대부분 감기, 배탈, 고혈압, 당뇨 등 흔하고 가벼운 질환들 때문이다. 이런 질환은 병원이 아니라 편하고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일차의료기관에서 치료하는 것이 모든 국가의 공통점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외국의 일류 고급병원이 없어서 외국인의 감기, 배탈, 고혈압, 당뇨 치료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미국 현지 수준의 비싼 진료비를 적용할 외국 일류병원의 유치는 경제자유구역 외국인의 의료이용을 오히려 가로막을 것이라는 점이다. 외국병원은 국내병원보다 최소 5-7배 비싼 진료비를 받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외국인에게 큰 부담일 뿐 아니라 이들의 복리를 책임질 외국 입주기업 입장에서도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경제자유구역에 거주할 외국인이 바라는 것은 ‘비싼 진료비를 받는 고급병원’이 아니라 ‘합리적 비용으로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편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정부가 경제자유구역 외국병원 유치의 긍정적 효과로 주장하는 것도 대부분 근거가 없는 내용들이다.
정부는 외국병원의 내국인 진료 허용을 통해 해외원정진료를 흡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해외원정진료의 50-70%가 외국 국적 취득을 위한 원정출산이다. 해외원정진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정출산은 경제자유구역 외국병원을 통해 흡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자유구역 외국병원이 통로 역할을 하면서 해외원정진료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외국의료에 대한 정보 부재, 행정 절차의 어려움, 심리적 부담감 등을 경제자유구역 외국병원이 상당 부분 해소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국내의료와 유관산업 발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국내의료의 질을 향상시키기는커녕 과다출혈 경쟁을 부추기고, 수익성이 좋은 고급의료를 활성화시킴으로써 국내의료의 낭비성과 비효율성을 증가시킬 것이다. 또한 외국병원은 국내 유관산업과의 연계보다는 이미 기술력이 충분히 축적된 자국 유관산업과의 연계에 더 치중할 것이기 때문에 유관산업 발전에 미칠 긍정적 효과도 미미할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폭증시키고, 건강보험제도의 근간을 심각하게 위협할 것이라는 점이다. 외국병원의 내국인 진료를 허용함으로써 국내병원과 외국병원은 동일한 환자를 보는 입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국내병원들은 외국병원에 부여한 각종 혜택을 동일하게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국내병원은 ‘외국병원의 내국인 진료 허용’을 계기로 건강보험 수가 인상, 영리법인 허용, 건강보험 탈퇴 허용, 고급의료 활성화 등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현행 국내의료제도의 근간을 허무는 것들이다. 의사협회와 병원협회가 외국병원의 내국인 진료 허용에 ‘조건부 찬성’ 입장을 밝힌 이유도 이런 각종 규제 완화를 노린 것이다.
정부가 이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도 밀실·졸속행정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정부가 주최한 공론화의 장은 단 1차례의 토론회밖에 없었다. 정책추진의 경과와 내용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는 중이다.
정부는 이 사안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고 주장하는데, 정부는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없다. 그리고 정부가 언급하는 여론조사도 경제자유구역 외국병원 설립을 찬성하는 입장을 가진 단체에서 수행된 것으로 여론조사의 객관성과 타당성을 갖춘 것으로 보기 힘들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지난 11월 15일에는 의료정책을 연구하는 교수와 연구자 143명이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안을 반대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였으며, 참여연대, 민주노총을 비롯한 제 시민사회단체가 개정안을 결사반대하고 있다. 또한 대한치과의사협회와 대한한의사협회 및 대한약사회도 개정안을 반대하는 청원서를 제출한 상태이다.
결론적으로 이번에 정부가 추진하는‘외국병원의 내국인 진료’는 최소한의 현실성과 경제적 합리성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그 근거도 불충분하고, 국민 의료비 증가와 건강보험제도의 약화를 야기할 것이며, 추진과정 자체도 국민적 합의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밀실·졸속행정으로 이루어진 정책이다.
국민건강에 직결된 제도는 면밀한 심사숙고를 거쳐 수립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국민건강은 실험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번 어긋난 제도를 다시 바로잡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번 정책의 효과와 영향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한 적도 없고, 이에 관련된 내용을 공개하여 그 타당성을 논의한 적도 없다. 마치 군사작전을 펼치듯 목표시한을 정해놓고 무조건 밀어붙이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에 우리 시민사회는 이번 정부정책을 국민건강 포기정책이자 파괴정책으로 규정하고, 이의 철회를 강력히 요구한다. 또한 외국병원 설립과 내국인 진료 허용의 타당성과 국내의료제도에 미칠 영향에 대한 객관적 검토과정을 거칠 것을 강력히 촉구하며, 이 같은 최소한의 절차마저 방기한 채 무조건적인 정책추진을 하는 정부 당국을 규탄한다.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 / 건강세상네트워크 /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 노동건강연대 /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 전국사회보험노동조합 / 평등사회를위한민중의료연합 / 참여연대 / 행동하는의사회 / 대한치과의사협회 / 대한한의사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