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제국기계에 대한 대안적인 비판 탐구서 출간!


안녕하세요. 다중의 활력과 지성 그리고 희망을 담아내는 [도서출판 갈무리]입니다.『제국기계 비판』출간 안내와 관련 정보를 담았습니다. 더 상세한 정보가 필요하시면 02)325-1485,4207(편집부)로 연락주세요. 감사합니다.

제국기계 비판

A Critique of the Emperial Machine

전 지구적 수용소, 보편적 전쟁질서, 휴식 없는 치안기계로
나타나는 현대 제국기계에 대한
구체적이고 대안적인 비판!
‘제국주의, 민중, 진보’라는 19~20세기의
근대적인 저항정치적 3대 화두를
‘제국, 다중, 자율’이라는 21세기의
탈근대적인 구성정치적 3대 화두로 전환시키기 위한
치밀하고도 실증적인 탐구!

□ 지은이 : 조정환
□ 쪽수 : 536쪽
□ 정가 : 20,000원
□ 판형 : 변형신국판(146×214)
□ 도서 상태 : 초판 / 양장본
□ 출판일 : 2005년 1월 1일
□ 출판사 : 도서출판 갈무리
□ ISBN : 89-86114-74-4 04300
□ 도서분류 : 아우또노미아총서6

『제국기계 비판』의 짧은 소개

안또니오 네그리의 삶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책 『아우또노미아』의 저자 조정환이 21세기의 세계질서를 ‘전 지구적 수용소, 보편적 전쟁질서, 휴식 없는 치안기계’(즉 제국기계)로 파악하고 이 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주체성인 다중(multitude)의 관점에서 명령과 착취로부터 해방될 대안을 모색한 책. 저자는 제국기계를 구성하는 인간, 자연, 기계류라는 3대 구성요소의 새로운 재배치를, 타율적 ‘제국기계’의 자율적 ‘공통기계’로의 대체를 그 전망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세 개의 부로 구성된다.

제1부는 ‘제국’에 관한 부로서 탈근대 세계가 어떤 갈등구조를 갖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등 『자본론』 초고들에서 전개한 포섭론에 입각하여 포섭의 탈근대적 가상실효적 변형을 다루고 오늘날의 합성된 주권이 제국주의인가 제국인가라는 쟁점을 살피며 제국에서 드러나는 미국 일방주의와 그것의 위기에 대해 알아본다.

제2부는 ‘다중’에 관한 부로서 오늘날의 계급구성이 다중의 기획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을 민중, 시민 기획과의 차이 속에서 검토한 후 싸이버스페이스와 주변부에서, 그리고 특히 한국의 1987년 이후의 역사 속에서 다중의 실제적이고 경향적인 출현에 대해 알아본다.

제3부는 ‘자율’에 관한 부로서 현 시기 제국적 주권합성과 다중적 계급구성의 전략적 갈등 속에서 인류의 자율의 전망을, 지구제국(global empire)을 지구촌(global village)으로 변형하기 위해 필요한 다중의 윤리정치적 힘과 덕에 대해 살펴본다.

『제국기계 비판』의 상세한 소개와 특징

1) 제국, 다중, 자율이라는 현대 세계의 세 가지 핵심적 화두를 균형 있게 고찰한다.
안또니오 네그리의 『제국』의 출간 이후 ‘제국’이라는 주제가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로 대두되었으나 그것이 미국 일방주의의 대두와 시기적으로 겹침으로써 제국을 ‘지구제국’이 아니라 ‘미제국’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힘을 얻어왔다. 제국, 다중, 자율이라는 세 개의 부로 짜여진 이 책의 구성은 ‘제국’을 ‘미제국’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가져오는 비관주의적 경향, 즉 미국의 힘에 대한 과장된 평가를 비판하면서 ‘제국기계’를 전 지구적 생산의 재편과 주권의 재배치라는 시각에서 좀더 균형있고 총체적으로 이해할 필요성을 제시한다. 이 책은 ‘제국’을 현대 세계의 다양한 힘들의 기계적이면서도 적대적인 배치로 파악하면서 그 속에서 제국에 맞서 생성되고 있는 ‘다중’의 힘을 자세하게 고찰하고 다중의 윤리정치학으로서의 ‘자율’과 ‘덕’을 제시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2) 각 부의 첫 장은 해당 부의 주제를 이론적 차원에서 탐구한다.
각 부의 첫 부는 주로 맑스의 생각을 현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무기로 전용하려는 시도이다.
저자는 제국을 이해하기 위해 제1부 첫 장에서 맑스의 포섭이론을 재고찰한다. 맑스는 『자본론』 초고들인 「직접적 생산과정의 제 결과」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설명하기 위해 ‘형식적 포섭(formal subsumption)에서 실제적 포섭(real subsumption)으로의 이행’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와 유사하게, 저자는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을 설명하기 위해 ‘실제적 포섭에서 가상실효적 포섭(virtual subsumption)으로의 이행’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가상실효적 포섭’이라는 용어는 저자가 창안한 새로운 개념이다.
제2부의 첫 장인 7장 「다중의 계보학」은 2부의 주제인 다중을 위한 이론적 분석을 담고 있다. 이 장에서 저자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 주체성의 새로운 구성에 관한 맑스 사상의 현대적 재구성을 시도한 안또니오 네그리와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의 주체성관에 입각하여 홉스(민중론), 그람시-알뛰세(계급민중론), 하버마스와 아렌트(시민사회론) 등의 주체성 개념을 비판하면서 민중/시민의 탈근대적 재구성으로서 다중 주체성의 출현과 발전을 분석한다.
제3부의 첫 장인 12장 「맑스․엥겔스와 프롤레타리아 자율」은 3부의 주제인 자율을 위한 이론적 분석을 담고 있다. 저자는 맑스․엥겔스의 문헌에 의지해 ‘자율’의 윤리정치를 비판하고 있는 전통적 사회주의의 태도에 대항하여 바로 맑스․엥겔스의 생각으로부터 ‘자율’의 윤리정치의 근거를 끌어내려는 흥미있는 이론적 시도를 담고 있다. 맑스․엥겔스는 19세기 후반에 무정부주의와 투쟁하면서 자율을 부정하고 권위를 옹호한 바 있다. 이것이 자율주의를 사회주의자들이 부정하고 비판해온 근거였다. 저자는 이것이 맑스․엥겔스에 대한 피상적이고 교조적인 독해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면서 당시 맑스․엥겔스의 문헌을 꼼꼼히 독해한다. 맑스와 엥겔스가 당시에 정치적 수준에서 자율을 비판하고 권위를 옹호했던 것은 당시의 생산과 산업이 권위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만약 경제적 수준에서 생산과 산업이 권위보다 자율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는 자율의 정치가 의미를 갖게 되리라고 전망한다. 저자는 바로 가상실효적 포섭의 시대인 탈근대가 생산과 산업을 사회화, 정보화, 자동화함으로써 권위보다 자율을 이용하는 시대로 진단함으로써 사회주의적 권위론 대신에 코뮤니즘적 자율론이 현실에 적합하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3) 각 부의 중후반부는 세계적 차원과 한국적 차원에서 다중, 자율이라는 세 가지 주제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지를 분석한다.
1부의 중후반의 장들에서는 ‘민족국가에 기반한 주권형태로부터 지구적 네트워크 주권형태로의 이행’을 제국주의론 비판이라는 형식으로 다루며, 세계시장의 완성을 제국적 주권 발생의 기반으로 다루고, 미국 일방주의가 현실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제국주권의 전 지구성이라는 구축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노무현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중심국가론과 지역혁신론, 그리고 신행정수도론을 지구제국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는 5장은 제국 이론을 한반도에 적용한 저자의 실제적 관점을 보여준다.
2부의 중후반의 장들은 다중이라는 개념이 선진자본주의나 서구에서는 타당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주변부에서는 타당하지 않다는 후진국 특수성론에 대한 실증주의적 비판을 담고 있다. 저자는 아프리카, 중동,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투쟁이 이전의 투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띠어가는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주변부에서 다중 주체성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상세하게 분석하며 11장과 12장에서는 주변부 체험을 갖고 있는 한국에서 다중 주체성의 출현양상을 분석한다.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1987년의 6~9월의 투쟁이 한국에서 전통적 민중 주체성에서 다중 주체성으로의 이행을 가져오는 분기점으로 작용한다. 1990년대 시민운동의 발전은 한국에서 다중 주체성 형성의 징후인데 그것이 민중운동과 분리됨으로써 현실에 실재하는 다중에 대한 이론적 개념화가 저지되어 왔다고 저자는 파악한다. 하지만 싸이버스페이스에서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는 다중의 모습은 다중이라는 개념을 더 이상 선진 자본주의적 현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게 한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3부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지배전략으로 확장되어 가는 가운데 세계와 한국에서 대의주의가 갖는 한계를 분석한다. 특히 2002년의 대선을 중심으로 대의주의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는 13장(원제: 「대의민주주의 속에 민주주의는 없다」)은 여러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의 신보수주의적 자유민주주의, 열린우리당의 참여민주주의, 민주노동당의 사회민주주의 등이 나타내는 문제를 극복할 대안으로 절대적 민주주의를 제안한다. 14장은 전통적 진보 개념이 척도의 관념에 묶여 있었음을 비판하고 구성으로서의 진보라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절대적 민주주의 개념을 좀더 구체화하며 15장에서는 자율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20세기 정치학의 두 주류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비판한다. 16장은 15장의 주제를 다중자율의 윤리정치를 요약하는 장이자, 이 책 전체의 주제를 윤리정치학의 수준에서 종합하는 장이다.

『제국기계 비판』 출간의 의미

1) 1991년 이후 지난 15년의 세계사가 걸프전쟁, 발칸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 숨막히는 전쟁의 역사로 전개되는 사회경제적이고 정치권력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이 책의 1부는 이 질문에 바쳐지고 있다.

2) 이 전쟁의 세계사가 왜 끊임없이 자신의 이면에 1992년의 로스앤젤레스 봉기, 1994년의 사빠띠스따 봉기, 1999년 이후 씨애틀, 퀘벡, 제노바로 이어진 대항-지구화 시위, 2003년의 전 지구적 반전시위를 수반하는지를 밝힌다. 그리고 제국의 전쟁에 대항하는 이 항의들을 누가 이끌고 있으며 이 주체성의 특징과 성격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이 책의 2부는 이 질문에 바쳐진다.

3) 20세기까지의 좌파 정치는 제국주의, 민중, 진보라는 3대 주제에 의해 이끌려 왔다. 이 세 가지 주제를 요약하는 정치적 이름이 사회(민주)주의였다. 『제국기계 비판』은 이 3대 주제가 우리 시대에 드러나는 한계와 문제점을 각 부에서 비판한다. 즉 1부는 제국주의 비판에, 2부는 민중 비판에, 3부는 권위와 대의를 정당화하는 진보 비판에 바쳐진다. 이 책은 제국주의를 제국으로, 민중을 다중으로, 대의주의적 진보를 자율로 전환시킴으로써 21세기의 정치적 3대 주제를 제시한다. 이 3대 주제를 종합하는 저자의 정치적 대안은 ‘삶정치로서의 코뮤니즘’이다.

4) 이 책은 최근의 정치적 쟁점에 대한 개입을 통해 자본의 지배 담론과 정책을 실천적으로 전복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제국, 세계시장, 동북아시아, 지역혁신, 행정수도 이전 등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는 문제가 이 책의 고찰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싸이버스페이스, 주변부, 1987년, 1997년 IMF 경제위기 등이 새로운 의미를 갖는 시공간으로 고찰되고 있다. 민족, 대의, 진보, 주권 등 마치 인류의 운명처럼 사용되고 있는 정치학 개념과 그 현실적 사용을 비판함으로써 이 책은 21세기 인류가 얼마나, 그리고 또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5) 이 책은 근대 이후의 정치학, 문학, 철학 등의 문헌분석을 통해 제시된 ‘제국’의 개념을 고전적 맑스주의 개념의 현대적 재전유의 방식을 통해 한걸음 더 전진시키면서 이 개념을 세계시장, 주변부, 동북아시아, 한국 등 구체적 현실에 접목시킨다.

저자 소개

조정환(Joe Jeong Hwan)
지금은 댐 건설로 수몰된 경상남도 진양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에서 일제하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연구했고, 1980년대 초부터 <민중미학연구회>, <문학예술연구소>에서 민중미학을 공부하며 여러 대학에서 한국근대비평사를 강의했다. 1989년에 월간 『노동해방문학』 창간에 참여하면서 문학운동의 주류였던 민족문학론에 맞서 ‘노동해방문학론’을 제창하여 당시 문학운동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다. 1990년 말, ‘국가보안법’에 의한 전국지명수배령이 내려졌고 1990년에서 1999년말까지 그는 9년여에 걸친 기나긴 수배생활에 들어갔다. 그러한 엄혹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이원영’이라는 필명으로 10여 권의 번역서를 펴내는 등 그의 연구와 사유의 과정은 중단 없이 지속되었고 이 ‘발견적 모색’의 긴 시간을 통해 그가 ‘자율주의로의 선회’라고 부르는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999년 12월 수배 해제 이후 그는 월간 『말』에 1년간 문화시평을 연재하면서 자율주의적 관점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제국 속에서 Within Empire 제국에 대항하여 Against Empire 제국을 넘어서 Beyond Empire’라는 의미의 ‘다중문화공간 왑 WAB’(지금의 다중네트워크센터) 을 통해 다중 지성과의 접속을 이어 갔다. 그는 또 그 동안 발전시켜 온 현대사회와 사회운동, 그리고 문학․예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집약하기 위해 ‘조정환의 걸어가며 묻기’라는 연속 저작집을 내고 있다. 현재 다중네트워크센터 (http://waam.net) 대표, 웹저널 『자율평론』(http://jayul.net) 상임만사, 도서출판 갈무리 공동대표,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성공회대학교 대학원에서 맑스주의 역사와 탈근대 사회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 『지구 제국』(갈무리, 2002), 『21세기 스파르타쿠스』(갈무리, 2002), 『제국의 석양, 촛불의 시간』(갈무리, 2003), 『아우또노미아』(갈무리, 2003)

편역서 『오늘의 세계경제 : 위기와 전망』(크리스 하먼, 갈무리, 1994), 『현대 프랑스 철학의 성격 논쟁』(알렉스 캘리니코스 외, 갈무리, 1995), 『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크리스 하먼 외, 갈무리, 1995), 『이딸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1』(쎄르지오 볼로냐 외, 갈무리, 1997), 『미래로 돌아가다』(안또니오 네그리 외, 갈무리, 2000)

번역서 『오늘날의 노동자계급』(알렉스 캘리니코스, 갈무리, 1994), 『디오니소스의 노동․1』(마이클 하트 외, 갈무리, 1996), 『디오니소스의 노동․2』(마이클 하트 외, 갈무리, 1997), 『사빠띠스따』(해리 클리버 외, 갈무리, 1998), 『신자유주의와 화폐의 정치』(워너 본펠드 외, 갈무리, 1999),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갈무리, 2002), 『무엇을 할 것인가』(갈무리, 2004)

〔저자 서문〕제국을 전복하기

1

이라크 전쟁 동안에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휘황찬란하고 다양한 상품들의 광고형상들과 나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부상자들, 시신들의 형상을 보아야 했고 아우성, 통곡, 절규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모든 장면들을 규율하는 것은 중무장을 하고 시청자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군인들과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장군들, 그리고 조지 부시였다.
바스라와 바그다드와 무술이 함락되고 티크리트가 함락되어 이라크 전체에 대한 제국의 전쟁적 약탈이 완료된 뒤, 후세인과 그 인척들의 궁전에서 집기들을 가지고 나오던 시민들은 중무장한 미군에 의해, 미군의 명령을 받은 이라크 경찰에 의해, 그리고 미군의 보호를 받으며 활동하는 자경단에 의해 약탈자들로 분류되고 그것들을 회수당했다. 나라 전체를 약탈하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아니 어쩌면 지구 전체를 송두리째 약탈하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약탈자, 안녕과 질서의 침해자, 즉 테러 분자로 범주화되는 것이다.
부시는 전면전은 끝났고 제한전만이 남았다고 선언했다. 전면전이 나라를 약탈하는 전쟁이라면 제한전은 질서를 회복하는 전쟁, 이른바 ‘민족을 새롭게 건설하는 전쟁’이다. 제한전의 금언(金言)은 정의(定義)와 당위로 구성된 두 문장으로 압축된다:“나의 질서가 아닌 것은 무질서이며 나의 정부가 아닌 것은 무정부이다(정의). 무질서와 무정부는 끝나야 한다(당위).”
민족건설 전쟁에서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보장하는 것은 치안이다. 치안의 논리를 그 원시적 형상에서 이해하는 것은 쉽다. 두 팔을 목뒤로 돌린 채 체념한 듯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사내와 그의 등 뒤에 총부리를 겨누고 번득이는 눈빛으로 그 사내를 밀치는 무장한 사내 사이의 경찰적 관계가 원시적 형상의 치안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발전된 형상은 무엇인가? 바그다드에 쏟아졌던 집속탄, 열화우라늄탄, 스마트폭탄(이것들의 배후에는 아직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자신의 존재만으로 명령을 하는 폭탄의 절대군주인 핵이 있다)과 그것들에 의해 찢겨지는 이라크 사람들의 살, 뼈, 집의 폭력적 관계가 그것이다. 첩보위성을 통해 샅샅이 재현되어 있는 이라크의 시공간적 지도와 실제의 이라크의 삶 사이의 정보적 관계가 그것이다. 부시의 입가에 머금어진 미소와 공포에 짓눌려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이라크 어린이의 눈 사이의 생물적 관계가 그것이다. 상품인가 죽음인가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텔레비전과 나의 지붕에 폭탄이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에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리는 유순한 시청자들 사이의 매체적 관계가 그것이다. 전쟁 이후에 치안이 오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 치안’에서 ‘규율적 치안’으로의 단계론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이렇듯 ‘치안기계’의 내부이다. 우리는 도시(city)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용소(camp)에 살고 있다는 지오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생각은 옳았다. 우리는 21세기의 쉰들러들이며 솔제니친들이다. 당신이 지금 있는 곳에 당신이 왜 왔는가를 생각해 보라. 그곳이 컨베이어벨트 앞이건, 슈퍼마켓의 계산대이건, 은행의 창구건, 강당의 의자건, 병원의 침상이건…. 당신이 그곳에 자유의사에 따라 왔는지 아니면 어떤 필연성(Not-wendig-keit)의 강제 때문에, 즉 궁핍(Not) 때문에 그곳에 수용되었는지 생각해 보라. 21세기에 미국은, 20세기에 독일과 소련이 국경 내부에 구축했던 강제 수용소를 지구 전체에 확산한다. 도시에서 수용소로! 이것이 이라크 전쟁을 통해 드러난 치안기계의 실상이다.
도시가 계약적 공장노동을 통해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착취한다면 수용소에서는 수용된 사람의 모든 것이 수용한 사람의 임의에 맡겨진다. 노동뿐만 아니라 지성이, 지성뿐만 아니라 재산이, 재산뿐만 아니라 이빨에 도금된 금이, 도금뿐만 아니라 타고 있는 몸이 산출하는 에너지가 수용소 체제에 약탈된다. 노동시간에 기초한 교환관계로서의 가치법칙의 패권은 확실히 끝난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끝내고 있는 것은 코뮨이 아니라 수용소다.
수용소에서 모든 개인들, 모든 집단들은 잠재적 범죄자, 잠재적 적이다. 이라크에서 미국의 실재적 적인 이라크 병사는 말할 것도 없고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이 자살전사로 오인되어 죽임을 당했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미․영의 병사들, 기자들, 수용주체들의 이른바 ‘아군’이 잠재적 적으로 오인되어 다치고 죽었는가? 이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범죄 혐의를 받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할 것인가? 이 잠재적 범죄자의 목록이 시리아, 이란, 북한 등에 그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수용소는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절대적 불신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어떤 동맹자들도 잠재적 범죄자의 일부이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잠재적 적이다. 테러가 일반적인 것으로 되는 만큼 오인도 일반적인 것으로 된다.
이라크 전쟁을 통해 지구상의 모든 국가의 주권자들은 이제 자신의 주권이 대략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짧은 시간에 초토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지구상의 모든 개인들은 미국이 마음을 먹기만 하면 언제든지 자신의 목숨이 박탈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이 세계의 누구든지 지금 샅샅이 감시되고 있는 지구 파놉티콘에 수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절감해야 했다. 도주할 ‘외부’는 더 이상 없다. 나의 목숨, 나의 땅, 나의 재산, 나의 권력, 한마디로 나의 삶 자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것이 아니다. 그 어느 것도 후세인의 것이 아니라면, 그 어느 것도 김정일의 것이 아닐 것이며, 어쩌면 그 어느 것도 부시의 것이 아닐지 모른다. 치안기계는 유일한 주권, 유일한 소유를 주장함으로써 주권과 소유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기계이다.
지금의 아랍이 그렇듯이 유럽도 러시아도 중국도 이 전 지구적 파놉티콘, 지구제국의 ‘외부’는 아니다. 그들은 지구적 수용소, 보편적 전쟁질서, 휴식 없는 치안기계의 귀족적 일부일 뿐이다. 유엔에서의 논쟁이 ‘전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전쟁을 앞당길 것인가 늦출 것인가’ 사이에서 맴돌았던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전쟁이 발발한 후 유럽이 미국의 승리(이것은 제국질서의 승리를 의미한다!)를 거듭 지지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미국이 승리하고 나서 유럽의 정부들이, 거대한 반전운동의 눈치를 보아가며, ‘이라크가 화학무기를 사용하면…’ ‘치안회복을 위해…’ 등 파병의 명분을 확보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이라크 전쟁은 군주제-귀족제-민주제 사이의 제국 내부의 위계를 좀더 분명히 만든다. 그것은 제국 권력의 국방을 담당했던 미국에 의한 일방주의적 쿠데타였던 셈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케 한 미국의 무력은 제국에 의해 보장되고 양육되어 온 무력이다. 유엔이 NATO, NPT, MD 등 각종 협정을 통해 군사력의 미국 독점을 얼마나 완벽하게 보증해 왔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절대적 공포와 절대적 절망뿐인가? ‘일차원적 사회’(마르쿠제)가 제국기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이 질문은 지금 제국 권력, 전 지구적 수용소, 자동 치안기계가 얹혀 있는 지반을 탐사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뚜렷이 보여주는 측면의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제국의 자립성의 부재, 그것의 치명적인 ‘자연’ 의존성이다. 미국의 전쟁이, 향후 십수 년 내에 감산되기 시작하고 수십 년 내에 고갈될 것으로 예상되는 석유에 대한 갈증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어린이들이 그리는 풍자만화의 반복되는 주제로 되었다.
미국의 석유소비는 세계석유 소비량의 4분의 1을 차지한다고 한다. 이것에 의해 부채질 된 미국의 ‘에너지 위기’ 의식이 무력을 통해서라도 산유지역에 흡혈 파이프를 박으려는 동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유지역에 흡혈 파이프를 박으려는 나라는 미국만이 아니다. 독일도, 프랑스도, 중국도, 러시아도 주요 산유국들에 파이프라인을 박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자연이 제공하는 유한한 에너지인 화석연료와 우라늄에 의존하고 있으며 또 이 의존에서 벗어날 어떠한 대안확보에도 무관심한 것은 특정한 민족국가인 미국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이며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된 인류의 삶 자체이다. 끊임없는 과잉생산으로 에너지에 대한 과잉소비를 자극하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지속되는 한에서, (높은 비용의 지불을 요구하는 대체 에너지가 아니라!) 자연이 주는 저비용의 화석연료의 확보만이 이윤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인 한에서 석유의 고갈은 필연적이다.
지금 미국의 권력자들과 결탁되어 있는 정유회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당신이 지금 얼마나 벌 수 있는가?’라는 단기적 문제가 아니라 ‘석유가 고갈되면 인류가 어떻게 되는가?’라는 장기적인 인류적 문제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이독경(牛耳讀經)이며 마이동풍(馬耳東風)일 것이다. 미국이, 그리고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이 대체 에너지의 개발보다 기존 천연 에너지의 독점적 착취의 길을 택하는 것은 대체 에너지의 개발이 불가능함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친생태-재생가능 대체 에너지 개발의 길로 나아갈 능력이 없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착취적 관계가 아닌 순환적 관계를 창출할 능력이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없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더 멀리는 우리로 하여금 에너지 과잉소비적인 지금의 자본주의적 삶과는 다른 삶의 양식을 강구하고 창출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을 알려준다.
미국은 OPEC에 미치는 후세인의 국가주의적 석유 정치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석유를 신자유주의적 시장 통제 아래로 가져오기 위해 후세인에 대항하는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더 심층에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 후세인의 국가주의적 석유 정치의 영향력(‘고유가’)은 고갈을 통해 자본에게 가해져 오는 자연의 복수(‘멸망’)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이 자연의 복수에 대한 단말마적 대응이며 자본의 삶과 자연의 삶 사이의 적대, 그 화해불가능성의 적나라한 표출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본은 주어진 자연만을 착취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점점 인위적 자연, 즉 인간과 그 사회를 착취하는 기계로 발전되어 왔다. 자본주의의 일차 에너지는 석유이지만 그보다 훨씬 주요한 에너지는 인간(과 그의 노동)이다. 유가는 석유의 희소성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 채굴 노동자들의 투쟁에 의해 좌우된다. 나이지리아, 베네수엘라, 이란, 쿠웨이트, 이라크 등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상승할 때 석유 자본가들이 그것의 비용을 유가에 전가함으로써 전 지구의 소비자들에게 그 부담을 돌리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보다도 산유국들에서 전제주의적 정치가 더 오래 지속되는 이유는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하기보다 그들을 억압하는 것이 석유 자본가에게 가져다주는 더 커다란 이윤 때문이다. 전쟁의 효과는 강력한 군사적 장치들과 비상조치들을 통해, 다시 말해 사회의 수용소화를 통해 채굴 노동자들의 요구와 저항을 쉽게 억제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측면에서는 자본의 ‘인간’ 의존성을 고백하는 방법에 다름 아니다. 자본은 자연에 의존하는 관계이자 동시에 인간(과 인간의 삶)에 의존하는 관계이다. 자연이 고갈, 부패, 변이, 전염, 소멸 등으로 복수를 한다면 인간은 불복종, 탈주, 저항, 반란, 혁명으로 복수를 한다.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침공은 이미 전 세계의 수많은 다중들을 거리로 나서게 하고 저항의 협력체를 발생시켰으며 새로운 저항의 방법에 대한 사유를 발생시켰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바스라에서 후세인에 반대하여 일어난 폭동은 바그다드에서 미국의 점령에 반대하는 시위로 발전했다. 전면전이 끝난 후 이라크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어졌다. 부시의 생각과는 달리 전면전은 끝나지 않았다. 제한전과 전면전은 시간 속에서 교체된다. 전 세계의 반전운동들은 이제 이 목소리들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전쟁은 끝났다며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른 양상의 삶을 살고 있는 ‘수용소 군도’의 수용민임을 성찰하면서 이들의 목소리에 맞추어 ‘수용소를 코뮨으로’ 바꾸기 위한 협력의 활동을 지속할 것인가? 이 질문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따라 ‘절망인가 희망인가’, ‘죽음인가 삶인가’라는 전 인류적 운명이 규정될 것이다.

2

이 책은 세 개의 부로 구성된다.
제1부는 ‘제국’에 관한 부로서 탈근대 세계가 어떤 갈등구조를 갖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전개한 포섭론에 입각하여 포섭의 탈근대적 가상실효적 변형을 다루고 오늘날의 합성된 주권이 제국주의인가 제국인가라는 쟁점을 살피며 제국에서 드러나는 미국 일방주의와 그것의 위기에 대해 알아본다.
제2부는 ‘다중’에 관한 부로서 오늘날의 계급구성이 다중의 기획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을 민중, 시민 기획과의 차이 속에서 검토한 후 싸이버스페이스와 주변부에서, 그리고 특히 한국의 1987년 이후의 역사 속에서 다중의 실제적이고 경향적인 출현에 대해 알아본다.
제3부는 ‘자율’에 관한 부로서 현 시기 제국적 주권합성과 다중적 계급구성의 전략적 갈등 속에서 인류의 자율의 전망을, 지구제국(global empire)을 지구촌(global village)으로 변형하기 위해 필요한 다중의 윤리정치적 힘과 덕에 대해 살펴본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원래 하나의 체계를 갖춘 단행본으로서 씌어진 것들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 『제국기계 비판』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나는 각 글들이 하나의 유기적 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각 장들과 부들이 서로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서로 연결되도록 배치하고 원고의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는가 하면 필요한 경우에는 가필했다. 제국기계가 치안기계, 수용소기계, 약탈기계로 나타나면서도 가상실효적 생산기계로, 다중과 자율의 생산공장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생각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제국기계 비판의 맥락을 짚을 수 있도록 각 부에서 이론과 실제가 함께 배치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각 부에 실린 여러 논문들 중에서 첫 글은 주로 제국, 다중, 자율과 관련한 이론적 문제를 다루며 나머지는 그것들의 실제적 양상을 다룬다. 다시 이 실제적 양상을 다룬 부분도 전 지구적인 양상을 다룬 후에 다시 한국이라는 특수한 지형 속에서 그것을 다시 고찰하는 방식으로 배치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록」으로 지난 두 세기에 걸친 역사를 투쟁의 순환과 유통의 측면에서 정리한 도표를 수록했다.
여기에 수록된 글들의 다수는 다양한 매체들에 발표되었던 것들이다. 초기 발표지면(제목을 고치고 내용을 새롭게 다듬은 부분이 많기 때문에 구체적 발표년도와 호수는 기재하지 않는다)을 제공해 준 月刊 『現代思想』(일어), Multitude(불어), 계간 『문화과학』, 계간 『당대비평』, 웹저널 『자율평론』, 계간 『황해문화』, 반년간 『맑스주의 연구』, 반년간 『시민과 세계』, 반년간 『정치비평』, 그리고 『한국정치연구』 등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일부의 글은 <맑스코뮤날레>, <비판산업사회학대회> 등의 학술대회나 여러 유형의 토론회에서 발표한 것을 이 책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이 모든 글에서 나의 관심은 현대 세계의 배치상태와 그 내부의 갈등을 파악하고 그 속에서 이 갈등적 상황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가져오는 창조적이고 내밀한 힘의 움직임을 가능한 한 예민하게 파악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이 책에서 이 과제는 ‘버츄얼리즘’(virtualism)이라는 지적 모험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우또노미아』(갈무리, 2003)가 내게 남겨놓은 화두이기도 했다. 1부 첫 장에서 지배의 새로운 양상(‘virtual subsumption’)으로 출현한 버츄앨러티가 3부 마지막 장에서 덕의 윤리정치(‘virtue’, ‘virtuosity’)로 역전되는 과정이 (2부에서 상술된) 가상실효적이고 인공지능적인 주체성인 다중에 의해 추동됨을 보여줌으로써 나는 버츄얼의 전복적 운동을 그려보려 했다. 이 시도는 나름대로는 강렬한 것이었지만, 그럴수록 내게 남는 것은 해답이 아니라 꼬리를 무는 더 많은 물음들이다. 이 중단되지 않는 물음들의 폭력이 내게 기쁨을 주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폭력이 ‘공통기계’의 은밀하나 요란스런 움직임의 진동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