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기본적 인권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권력에 의한 살인을 규탄한다
우리는 훼손되어서는 안될 인간의 건강과 생명이 거리노숙상태에 있는 노숙인이라는 이유로 또다시 무참히 짓밟힌 사건을 접했다. 지난 3일, 쓰러져있는 채로 발견된 노숙인 한 명이 경찰에 의해 호송출장소에서 구치소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사망한 사건이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쓰러져있던 노숙인이 140만원의 벌금을 내지 않은 수배자임을 확인하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호송출장소로 데리고 갔다. 경찰은 대변조차 가리지 못했던 고인이 노역을 할 수 있는 건강상태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성동구치소로 이송했고 구치소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는 숨을 멈춘 상태였다.
경찰관 직무집행법은 “병자, 부상자 등으로서 적당한 보호자가 없으며 응급의 구호를 요한다고 인정되는 자”를 발견한 때에는 “보건의료기관 또는 공공구호기관에 긴급구호를 요청”하도록 하고 있으며 ‘수형자 호송 등에 관한 규칙’ 역시 “피호송자가 질병에 걸렸을 때에는 적당한 치료를 하여야 하며” “피호송자를 받은 관서는 즉시 치료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걷기조차 힘들어하는 고인을 의료기관으로 옮기지 않은 것은 지휘책임이 있는 검찰은 물론이거니와 경찰의 부당한 직권남용이자 범법행위다.
건강과 생명에 대한 권리는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보장되어야 할 기본적 인권이다. 특히 긴급구호를 요하는 상황에서 응급의 의료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하는 것은 인권의 실현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고인이 연고가 확인되지 않는 거리노숙상태였다거나 벌금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명을 빼앗길 근거가 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이 낙인과 차별의 근거가 되고 공공의 직무를 수행하는 검․경에 의해 아무렇지도 않게 법의 규정조차 어기는 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더욱 분노하며 인권을 부정하는 국가폭력의 실상을 확인한다.
노숙 자체는 기본적 인권인 주거권 침해의 극단적 모습이다. 안정된 주거를 상실한 채 거리생활에서부터 사회복지시설, 병원, 쪽방과 고시원에 이르기까지 불안정한 주거생활의 악순환을 반복해야 하는 노숙인들은 그 과정에서 행정체계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고 신분도용 등 각종 범죄에 악용당하는 표적이 된다. 공공의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 경찰과의 불가피한 마찰 또한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숙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범죄자로 취급당하거나 최소한의 권리조차 인정되지 않은 부당한 대우를 강요당했으며 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묵살되어왔다. 경찰은 더 이상 이러한 현실을 담당자의 실수로 돌리거나 노숙인들 자체의 문제로 왜곡시키지 말고 근본적인 시정의 노력을 보여야 한다.
또한 검찰에서 직접 사인이라고 밝힌 폐렴이 고인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점은 고인이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지병을 앓아왔음을 짐작케 한다. 2004년 노숙인 건강실태조사는 35~39세 남성 노숙인의 사망률이 평균의 4.81배에 달하는, 경악할 만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고인의 경우처럼 오랜 빈곤화의 과정에서 노숙인들이 안고 있는 한두가지 이상의 만성질환은 결국 거리에서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심각한 인권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노숙인지원체계가 마련된 지 8년이 되어가지만 객사를 예방하는 의료지원정책은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노숙인에 대한 의료지원예산을 삭감시키거나 임기응변 식의 대책으로 현상을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우리는 전문화된 치료와 재활 영역의 기반 확충, 정신질환․중독성질환․중증 만성질환․전염성질환에 대한 위기개입과 24시간 밀착된 지원활동의 강화가 시급하다고 누누이 주장해왔다. 그러나 우리의 요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으며 결국 또다른 죽음을 부르고 있다.
거리노숙과 취약한 주거는 노숙인들을 각종 질병에 노출시키고 있으며 노숙인의 건강권을 위해서 주거지원정책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공식집계된 노숙인의 상당수가 집중되어 있는 서울시의 경우 주거지원정책이 비어있는 가운데 시설입소와 자활지상주의로 노숙인들을 내몰고만 있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번 사건은 안타까운 죽음 하나로 묻혀서는 안된다. 노숙인을 ‘막 다뤄도 그만’인 사람으로 여기는 검․경의 저열한 인식, 주거와 건강이라는 기본적 인권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권력에 의한 살인일 따름이다. 우리는 사건에 대한 한점 의혹 없는 수사는 물론이며 이와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검․경의 사과와 시정계획을 요구한다. 서울시 역시 노숙인들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하고 시행해야 한다. 우리는 인권을 보장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더 이상 없도록 인권실현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06년 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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