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민주화가 반미의 핵심 동력”(2003.06.02)
<에드워드 사이드의 '아랍 상황' 분석>
이라크 점령에 성공한 미 부시행정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평화를 이루겠다며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중동문제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미국 주도 평화협상의 전망에 대해 극히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측의 테러 척결을 우선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협상은 팔레스타인의 내전을-무장해제를 시도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이에 저항하는 무장단체간의-유발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인 영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 교수(미 콜럼비아대)는 이라크전쟁은 미 군사력에 의한 중동지역 질서 재편의 서곡이며, 이를 방치할 경우 아랍권 전체는 미국 및 이스라엘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라면서 아랍권의 단결과 저항을 촉구했다.
사이드 교수는 이집트의 영자 주간지 알 아흐람 위클리 최근호(5월 22-28일자)에 기고한 칼럼 ‘아랍의 상황(The Arab condition)’에서 2차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 중동정책은 이스라엘 보호 및 석유자원의 자유로운 흐름 보장이라는 단 2가지 원칙에 따라 운용돼 왔으며, 이 두 원칙이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아랍민족주의의 파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번 이라크전쟁은 이러한 구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첫 단계라는 것이다.
사이드 교수는 아랍인은 단일민족(nation)으로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노골적 침략행위에 공동으로 맞서 싸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것은 아랍권의 ‘분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아랍권의 단결을 추구하기보다는 미국과의 우호관계 유지만을 염두에 둔 아랍 국가들간의 분열도 문제지만, 민주주의의 결여로 인한 지배엘리트와 일반 국민들간의 분열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사이드 교수는 미국의 중동 재편이 성공할 경우 전체 아랍권은 앞으로 수십년간 굴종과 반목과 불화의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를 막기 위해서는 민주화를 통해 지배엘리트와 국민들이 반미의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다음은 이 칼럼의 전문.
-아랍의 상황(The Arab condition)/Al-Ahram weekly-
지금 많은 아랍인들은 지난 두달간 이라크에서 벌어진 일들을 재앙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사담 후세인 정권은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추악한 권력이었으며 축출돼야 마땅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후세인 정권의 독재와 폭력에, 그리고 이에 의한 이라크 국민들의 고통에 분노의 감정을 느껴온 것도 사실이다. 너무도 많은 국가와 개인들이 사담 후세인의 독재를 못 본 체 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라크를 폭격하고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허가한 것은 도덕적 권위나 합리적 주장이 아니었다. 오로지 군사력 하나였다. 수십년간 이라크의 바트당 세력과 사담 후세인을 지원해 온 미국과 영국은 이제 뻔뻔스럽게도 후세인의 독재를 지탱해준 자신들의 책임을 부정하면서 후세인의 독재로부터 이라크를 해방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이라크 국민과 이라크 문명에 대한 영미의 불법적 공격 이후에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앞으로 아랍인 전체에 매우 중대한 위협이 될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랍인은 하나의 민족(a people)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하는 것이다. 아랍인은 외부의 개입과 통치에 순응해야만 하는, 서로 아무 관련도 없는 국가들의 임의의 집합체가 아니다. 오스만 터키가 아랍을 복속시킨 지난 16세기부터 지금까지 이 지역에는 제국에 의한 지배의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터키를 대신했으며 2차대전 후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그 뒤를 이었다. 현재 미국 및 이스라엘의 오리엔탈리즘 속에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는 영향력 있는 사상, 1940년대 후반 이후 미국 및 이스라엘의 정책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생각이 있다. 아랍민족주의에 대한 악의적이며 뿌리깊은 적대감, 그리고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를 분쇄시키고야 말겠다는 정치적 의지가 그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아랍민족주의의 기본 전제는, 내용 및 형식에서의 다양성과 다원주의에도 불구하고, 아랍어를 쓰고 이슬람문화에 속하는 사람은 하나의 민족(a nation)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북아프리카에서 이란 서부 국경에 이르는 지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국가들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 전제를 자주적으로 표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노골적으로 공격받아 왔다. 1956년의 수에즈전쟁에서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전쟁,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 및 축출, 그리고 이번 이라크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자들은 특정 정권의 교체를 전쟁의 공식목표로 내세웠지만 진정한 목표는 아랍권 내의 가장 강력한 국가를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아랍인을 하나로 묶어 강력하고도 자주적인 정치세력으로 키워내겠다는 야망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나세르를 무너뜨리기 위해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 미국 등이 공격에 나섰던 것처럼, 오늘날 미국의 목표도 중동의 지도를 아랍이 아닌 미국의 이익에 맞도록 고쳐 그리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아랍권의 분열, 집단적 무능력, 군사적ㆍ경제적 취약함에 의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경제 정치 문화 분야에서 아랍 국가들간의 협력을 도모하기보다는 개별 국가들의-그것이 이집트가 됐건, 시리아 쿠웨이트 요르단이 됐건-독자성(separateness)을 인정하는 편이 더 나은 것이며 현실정치에 보다 유용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물론 완벽한 통합을 이룰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유용한 협력과 계획을 도모하는 편이 이번 이라크위기에 즈음해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한 수치스러운 아랍정상회담보다는 훨씬 낫다. 모든 아랍인은 이렇게 묻는다. 또한 모든 외국인들도 묻는다. 어찌하여 아랍인들은 자신들이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대의명분을 위해, 나아가 아랍인들이 실제로 진정 원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자신들의 역량과 자원을 한데모아 싸우지 못하는가?
아랍민족주의의 진작을 위해 시도된 모든 것들은 그 잘못과 단견, 낭비와 억압, 그리고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지금까지의 성취는 별로 없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20세기 초반 이후 아랍인들이 집단적 독립-아랍권 전체든, 또는 그 일부든-을 이루지 못한 것은 이 지역의 운명이 외세에 의해 결정됐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는 중동지역의 전략적ㆍ문화적 중요성 때문이다. 오늘날 어떠한 아랍국가도 자국의 자원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또한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입장을 취하지도 못한다. 특히 그러한 입장이 미국의 정책들을 위협하는 것처럼 비칠 때는 더욱 그러하다.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지난 50여년간, 특히 냉전이 종식된 지난 10여년동안 미국의 중동정책은 오로지 2가지 원칙에 의거해 운용돼 왔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과 아랍 석유의 자유로운 흐름을 보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두 원칙은 아랍민족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반대를 의미한다. 모든 경우에 거의 예외 없이 미국의 정책은 아랍 민중의 열망을 경멸했으며 공개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책은 놀라울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나세르의 몰락 이후 아랍 지도자 중 미국에 반기를 든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랍 지도자의 거의 대부분은 미국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 왔다.
아랍 국가들에 대한 극단적인 압력이 가해지는 동안에도(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이나 이라크 정권은 물론 국민까지도 겨냥한 경제제재, 리비아ㆍ수단에 대한 미국의 공습, 시리아에 대한 침공 위협,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압력 등) 아랍 국가들이 집단적 무력함이란 그저 경악스러울 뿐이다. 이들 국가들의 엄청난 경제력과 아랍 민중의 저항의지에도 불구하고 아랍의 지도자들은 항의의 흉내조차 내지 못했다. 분할통치라는 제국의 통치방식은 그 위력을 과시했다. 각각의 아랍 국가들은 자신의 행동이 미국과의 양자관계에 손상을 입히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긴급한 위기상황에서도 자국과 미국과의 양자관계 유지라는 목표가 최우선적으로 고려됐다. 어떤 국가들은 미국의 경제지원에 의존했고 또 다른 나라들은 미국의 군사보호에 기댔다. 그리고 아랍 지도자들 모두는 자국 국민들의 복지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만큼이나 다른 아랍 국가들을 믿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보다는 미국의 교만과 경멸을 감수하는 길을 택했다.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남은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아랍 국가들에 대한 박대가 더욱 심해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실 아랍 국가들이 외부의 진짜 침략자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자기들끼리 곧잘 싸워 왔다는 작금의 현실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 결과 오늘날, 이라크전쟁이 끝난 후, 아랍(an Arab nation)은 완전히 기가 꺾인 채 두드려 맞고 땅에 쓰러져 미국과 이스라엘의 국익을 위해 중동지역의 지도를 다시 그리겠다는 미국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있다. 심지어 이 요란스런 중동평화계획에 대해서도 아랍 국가들은 자신들의 집단적인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아랍 지도자들은 그저 부시와 럼스펠드와 파월 주위를 맴돌면서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삼척동자가 보더라도 미국의 로드맵은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의 내전을 유발하고, 팔레스타인에게는은 아무런 대가도 제공하지 못한 채 미국과 이스라엘이 내건 ‘개혁’의 무조건 시행을 요구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 마당에 압바스 총리와 같은 2류 지도자가-그는 언제나 아라파트의 충실한 부하였다-콜린 파월을 얼싸안는 장면을 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더 망가져야 한단 말인가?
한편 전후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구상은 이제 분명히 드러났다. 그것은 1967년 이후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구시대적, 식민지적 점령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이라크 도입이 기본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이라크로 하여금 미국의 정책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고, 이라크 석유가 미국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하며, 법질서 유지는 최소한에 그치도록 하는 것이다. 진정한 야당세력이나 진정한 민주제도가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어쩌면 이라크를 레바논과 같은 내전 상태로 몰아넣는다는 구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종류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최근 미국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이라크의 새로운 헌법 제정을 책임질 인물로 뉴욕대학의 32살짜리 법학 조교수 노아 펠드만이 선정됐다고 한다. 이 주요한 인선에 대해 미국 언론들은 펠드만이 정교(Orthodox)계 유태인 가문출신으로 15살때부터 아랍어를 배웠으며 이슬람법에 정통한, 매우 탁월한 인재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펠드만은 아랍세계에서 법을 운용해본 경험이 전혀 없다. 이라크에 가본 적도 없으며, 전후 이라크의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배경지식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얼마나 이라크에 대한 공개적 모욕인가. 또한 이라크의 장래를 위해 헌법 제정을 완벽하게 해냈을 수도 있었을 아랍 및 이슬람 세계의 무수한 법률 전문가들을 얼마나 우습게 본 처사인가. 하지만 미국은 이들을 모두 내치고 새파란 미국 젊은이에게 헌법제정을 맡겼다. 아마도 미국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이라크에게 새로운 민주주의를 가져다주었지.”라고. 아랍세계에 대한 미국의 경멸은 이 정도로 뻔뻔스럽다.
이 모든 수모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이 그저 무력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너무도 실망스럽다. 집단적 대응을 위한 진지한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처럼 외부에서 아랍세계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위기의 순간에 지도자들이 국민을 향해 아랍세계 전체에 대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힘을 모아달라는 호소하고 있다는 흔적마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은 아랍세계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리낌없이 말하고 있다. 그 변화란 무력에 의해 강요될 것이다. 미국의 군사력에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노력의 배후에는 아랍인들의 단결을 완벽하게 파괴한다는, 우리들의 삶과 열망의 근원을 회복불능의 상태로 바꿔놓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아랍의 지도자와 민중간의 사상 유례가 없는 동맹, 이것만이 이러한 힘의 과시를 억제할 수있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모든 아랍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새로운 제국주의에 대한 조직적 저항운동을 벌이기 위해서는 사회를 개방하고 모든 억압적 안보장치들을 해체해 국민들로 하여금 이 대열에 동참하도록 해야 한다. 강제로 전쟁에 동원된 사람들, 침묵을 강요당하고 억압받은 사람들은 결코 스스로 떨쳐 일어나 저항의 행렬에 동참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대결 속에 스스로 선포했던 계엄령으로부터 아랍사회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자유와 민족자결을 지키기 위해 (독재와 억압 대신) 민주주의를 환영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공동전선에 참여하려는 모든 시민들을 우리가 환영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동의 없이 우리의 삶을 바꾸려는 제국의 흉계에 대항하여 우리의 모든 지적ㆍ정치적 자원들을 한데 끌어모을 필요가 있다. 어째서 저항은 극단주의자와 절망적 자살테러리스트의 몫으로만 남겨져야 한단 말인가?
지난해 아랍세계에 대한 유엔인간개발보고서를 읽었을 때의 느낌을 얘기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보고서에 아랍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적 간섭의 영향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다는 데에 놀랐다. 이같은 무지와 무관심이 아랍세계에 얼마나 깊고 오랜 영향을 미칠 것인가. 단언컨대 나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의 모든 문제가 전적으로 우리 책임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파편화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보고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의 부재는 부분적으로 서방 열강과 소수 지배세력의 야합의 결과이다. 아랍인들이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드라마의 몇몇 배역들이 민주주의를 위협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째서 미국식 민주주의(자유시장에만 관심이 있고 사회복지에만 거의 관심이 없는)만을 유일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진지한 토론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제로 되돌아가 보자.
미국과 이스라엘의 학살 앞에서 아랍지도자들이 맹목적으로 콜린 파월의 뒷꽁무니를 쫓아다니기보다는 아랍인들의 단결의 모습을 과시했다면 지금쯤 팔레스타인의 협상 지위는 훨씬 강화됐을 것이다. 아직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어째서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이른바 ‘미첼 플랜’ ‘테넷 플랜’ ‘쿼르텟 플랜’ 등 미국이 내놓은 평화계획의 뒤만 쫓아다니는지를. 어째서 스스로 이스라엘의 점령에 대항하는 단일하고 통일된 전략을 내놓지 못하는지를. 어째서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을 향해 ‘우리의 적은 하나다. 우리의 땅과 우리의 삶에 대한 그들의 계획은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 모두 뭉쳐 이 적과 맞서 싸우자’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근원적 균열, 이것이 아랍세계의 문제의 뿌리다. 이는 팔레스타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랍세계가 전체가 이 병을 앓고 있다. 민주적 참여에 대한 근본적 두려움, 국민들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주면 제국주의 본국으로부터의 혜택이 줄어들 것이라는 피식민지 통치엘리트들의 두려움, 이는 제국주의가 남겨놓은 악성의 유산이다. 그 결과는 공동의 투쟁전선에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참여를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파편화와 유치한 분파주의를 영속시킨다. 오늘의 상황이 보여주듯이 너무도 많은 아랍 시민들이 자신들의 가장 절박한 문제에 참여는커녕 관심마저 갖지 못하고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오늘날 아랍 민중들은 자신들의 장래와 관련해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전면적인 공격에 직면해 있다. 이스라엘과의 협조하에 미국은 우리들을 굴복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자국의 국민들보다는 초강대국에 우선 충성하며, 서로를 물어뜯는 불화와 반목의 세계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다. 지금의 분쟁이 앞으로 수십년간 우리의 살림터의 모습을 결정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눈감은 것이나 다름없다. 열정을 잃은 국민, 불안에 떠는 지도자들, 소외당한 지식인들을 한데 묶어 놓은 이 음험한 철의 족쇄를 지금 당장 깨뜨려야 한다. 지금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위기의 순간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사상 전례가 없는 특단의 대책이 강구돼야 한다. 첫 번째 단계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희망 없는 분노와 의미 없는 반동으로 몰아넣는 이 상황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누구도 지금의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대안의 모색이야말로 커다란 희망을 약속한다.
관련 링크 ( http://weekly.ahram.org.eg/print/2003/639/op2.htm )
에드워드 사이드/미 콜럼비아대 교수
(자료출처: 프레시안, 2003년 6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