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김]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오수연)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작성 : 오수연
바그다드는 서서히, 그러나 힘겹게 살아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승자가 누구인지 다시 한 번 묻
고 싶습니다. 사담 후세인 패거리는 이라크 국민들을 계란 한 알조차 아쉬운 피폐와 참화 속에 남
기고 도망쳤고, 미군 역시 삼 주가 넘도록 마비된 사회 제반 시설을 복구하기는커녕 탱크로 시내
를 종횡하고 있을 뿐입니다. 탱크가 방향을 틀 때마다 무쇠 바퀴에 보도 블럭들이 와자작 깨져나
갑니다. 공습으로 인한 파괴에 비교할 수야 없겠습니다만, 그들이 오래 머물 수록 역사 깊은 이 도
시는 더 긁히고 금이 갈 것입니다. 멈춰라, 물러서라, 네가 얼마나 급하든 내가 알 바 아니다, 이것
이 미군들이 이라크 민중들에게 외치는 유일한 세 마디입니다. 그것도 영어로 말입니다. 이라크
민중의 해방을 위해 여기 왔다면, 미군은 전쟁 직후 이라크인들의 일상이 돌아가게끔 대책까지 갖
고 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기름 바다 위에 떠 있다는 이 나라 백성들이
차에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 앞에 장사진을 치고, 전기가 귀해 밤에 호롱불을 밝히고, 가스가 없
어 나무와 조잡한 석유 버너로 음식을 끓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버너가 터져 화상을 입는 사람
들도 많습니다. 시장에는 야채와 과일이 등장하고 케밥을 굽는 연기도 다시 솟아나지만, 모든 것
이 두 배는 가격이 올랐습니다. 거의 모든 남자들이 직장을 잃었으므로, 피부 물가는 네 배, 다섯
배 이상이고 계속 올라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혹시라도 일거리를 찾을까 해서 온통 거리로 쏟아
져 나와 헤매다가, 이것이 그토록 바라던 자유냐고 울분을 터뜨립니다. 사담 후세인이 밀려난 거
분명히 잘 됐습니다. 전투에 지기 전에 그는 이미 부패한 권력의 냄새나는 강시에 지나지 않았습
니다. 그러나 사담 이후 미국을 등에 업은 정권이 들어선다면, 그건 이라크 민중의 해방과 어떤 관
계가 있습니까? 전쟁이 끝난 지금도 미군은 지나간 전쟁을 합리화할 수 없습니다. 전투에 승리했
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승자가 아니며, 사담을 증오했으나 미국을 원하지는 않았던 이라크 민중
은 더군다나 아닙니다. 누가 승자입니까?
<한국 이라크 반전 평화팀(평화와 나눔 연대)>과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은 서
로 협조하여 가난한 지역의 민중들을 돕기로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의료 혜택이 없는 지역에 주
민들이 자구책으로 마련한 ‘임시 진료소’를 돕는 일입니다. 전쟁 이후의 구호라면 전쟁으로 결핍
된 물품과 도움을 당장 지원해주는 긴급 구호와 사회 서비스 재건을 돕는 장기적 구호로 구분되
고, 우리가 하려는 것은 긴급 구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라크로 쏟아져들어오다시피하는 덩
치 큰 여러 국제 구호 단체들이 대부분 장기 구호를 염두에 두고 있는 데 반해, 유독 우리만 임시
적 미봉책인 진료소들을 지원하기로 한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는 앞줄에서 이미 암시한
대로 우리 같은 작은 덩치의 구호 단체들이 장기 구호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현실적 판단 때
문입니다. 둘째로, 사회 서비스 재건이라는 거창한 계획에 밀려 임시적이지만 절실한 요구들이 무
시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줄지은 트럭에 실려온 구호 약품들이 거의 모조리 큰 종
합병원으로 들어가므로, 정작 전쟁 전부터 종합 병원에 갈 여력도 없었던 기층민들은 여전히 약
구경하기가 어렵습니다. 종합병원에는 중병에 필요한 특별한 약품 말고 일반적인 의약품은 최소
한 두 달 이상 비축량이 있다고 하는데, 동네 진료소에는 비타민조차 부족합니다.
우리가 임시 진료소에 주목하는 세 번째 이유는, 이들 진료소들이 임시적인 이유는 당장만 지나
면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얼마든지 필요하지만 지탱할 여력이 없어서 그렇다
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들 진료소들은 전쟁으로 병원들이 문을 닫아 본의 아닌 휴가
를 얻은 의사들의 도움으로 운영되므로, 병원이 다시 시작되어 의사들이 돌아가면 어쩔 수 없이
없어져야 합니다. 하루에도 수 백 명씩 몰리는 환자들은 그 후에는 예전처럼 의료 혜택을 받지 못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이라크의 의료 서비스에 대해 설명하자면, 공식적으로는 모든 의
료 혜택이 무료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병원은 거리도 멀고 병원비도 만만찮아 기
층민들은 죽을 병 아니면 묵혔던 것 같습니다. 조그만 동네 진료소가 열렸다고 찾아오는 환자들
이 류마티즘, 당뇨병, 천식 같은 고질병에다 발육 부진이나 천성적 기형으로 팔다리가 꼬인 심각
한 질환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들 빈민촌이 전쟁 이전부터 의료 사각 지대였고, 전쟁마저 지나간
지금 상당 기간, 어쩌면 오래 더욱 상황은 나빠지리라고 봅니다. 즉, 긴급하게 우리가 일을 시작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며, 능력과 정성만 있으면 장기적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사업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의사가 있고 약품을 지속적으로 댈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라크에 만든 진료소 하나는
우리 나라에서 수십 개의 병원이 하는 만큼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4월 28일과 29일 이틀 동안,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의 내과의 송광욱, 한의
사 이용욱, 고수정 세 의사 선생님들은 ‘뉴바그다드’ 알 마시단 지역에 있는 ‘알 몬타다 보건소’에
서 진료하셨습니다. 의사가 앉을 자리마저 없을 정도로 진료실은 북적거렸으며, 복도를 가득 메
운 대기 환자들은 차례를 기다리다 못해 문을 열어젖히고 들이닥치기도 했습니다. 어림잡아 이틀
동안 두 분 한의사는 250명의 환자를, 송선생님은 100-150명의 환자를 보신 것 같습니다. 환자들
의 질병이나 건강 상태를 의사 아닌 저희 평화운동가들이 알 수야 없습니다만 (이에 대한 보고는
의사 선생님들이 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얼굴에 가득 어린 기대감만은 누구에게도 역력했습니
다. 외국인이나 신종 의료 기술, 신비로운 동방치료법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저희
가 느낀 것은 그 이상입니다. 그들은 의사 선생님들의 친절과 헌신적인 태도를 민감하게 알아차렸
습니다. 아랍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줄 알면서도 하염없이 통증을 호소하고 또 그 두 배는 역시 알
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외로운 것 같았습니다. 따뜻한 얼굴과 사랑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겪었으나 정부건 미국이건 호소할 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가
진 것 없는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아시아 대륙 너머에서 한국인 의사들이 와서 어디가 아프
냐고 묻고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위안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전쟁은 재앙이며, 이들
에게 재앙이 닥쳤습니다. 우리 나라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건 없건, 우리는 인류의 일원으
로서 이들의 불행을 나눌 책임을 느낍니다. 어딜 가나 환자들이 줄줄 쫓아다녔고, 이틀 동안 앉을
새도 없이 진료하고, 진료가 끝난 다음날 약품을 사러 바로 요르단으로 나가셔야 했던 세 분 의사
선생님들은 분명 몸살이 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환영받으셨으니 그 분들은 행복하십니
다. 저희들 또한 고통과 기쁨을 주고 받는 그때 그 자리에 같이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뉴바그다드’는 빈민 지역 중에 우리가 지속적으로 인연을 맺기로 한 곳입니다. 빈민 지역이야 많
겠지만 수십 년 탄압을 받으면서 나름대로 폐쇄적이라 외국인이 한 번 왔다가는 식의 방문은 가능
하지도 않고 위험하기도 합니다. 이들 주민들과 어울리려면 우선 지역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고 신
뢰를 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정 지역을 선택해서 지역 공동체와 협력관계를 만들어나
가기로 했습니다. 이번에 의사 선생님들이 진료했던 ‘알 몬타나 보건소’도 지역 공동체에 자문을
구해 선택하고, 여자 환자를 남자 의사가 진료해도 되느냐 같은 사소한 것까지 모든 절차를 협의
하고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역주민과 우리는 시혜를 베물고 받는 수혜 관계가 아니라 같이 일하
는 공조 관계입니다. 중요한 언급을 한 가지 해야겠군요. 이 글에서 말하는 ‘지역 공동체’란 구체적
으로 ‘시아파 종교 지도자가 이끄는 지역 커미티’를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종교와 연루되기를 원
하지 않습니다만, 종교가 생활이고 문화인 이 지역에서 칼로 자르듯 종교를 분리해내기는 불가능
합니다. 속 편하기야 몇몇 단체들이 하듯이 큰 병원에 약품을 주고 가버리면 되겠지만, 우리가 바
라는 바는 아닙니다. 이라크 민중들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는 한 우리는 지역공동체와, 그리고 그
지역공동체의 중심인 종교와 접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문화와 사상을 존중합니
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이 종교 분쟁을 이용해서 폭압 정치를 해왔던 터라 정치 또한 종교에 얽혀
들 우려가 있는데, 우리는 이 부분에서는 명확한 선을 그을 것입니다.
권력과 통치가 공백인 지금, 모든 책임자와 공무원이 떠나버린 시아파 지역에서는 시아파 종교 지
도자들이 행정을 대신하고 굶주린 주민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이들을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보다는 그 지역 주민들이 판단할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압제가 아닌 자치를, 배급
이 아닌 분배를 시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랍니다. 시아파와 수니파는
하나다! 미국은 물러가라, 이라크는 이라크인들의 힘으로 재건돼야 한다! 외국 언론들은 내전이
벌어질 거라는 둥 불길한 예상들을 내놓고 있습니다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미국은 이 오래된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습니다. 이라크인들이 해결할 것입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그
리고 미래를 위한 투쟁을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